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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며 사람들은 더 큰 것을 원한다.
그것이 명성이든, 권력이든, 소유든 말이다.
그러나 너무 큰 것은 그 크기만큼이나 파장을 많이 남긴다.
그 파장은 때로 긍정적이기도 하지만 대개는 부정적인 형태를 띤다.
예수님과 같은 영적 거인의 죽음은 그만큼 큰 파장으로 인류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누가 예수님과 같을 수 있을까?
인간이 더 많이 갖고, 더 알려지고, 더 커지면 그 것은 누군가의 것을 빼앗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두에게 가지도록 주신 것을 독점한 것이라 할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책임을 슬쩍 그 사람에게 전가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공정한 상황이 아니다.
이럴 때, 이 사람이 그 자리를 뜨게 되면 그 빈 자리는 너무 커서 도무지 채울 수 없게 된다.
인간 그 누가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너무 관심의 집중을 받는 것은 좋지 않다.
한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하나님께서 주신 만큼만 소유하고 누리는 것이 서로에게 복이 아닐까.

최근 한 대형 교회의 원로목사님이 별세하셨다.
너무 많이 존경받고, 너무 많이 관심을 받던 터라 그 빈 자리가 걱정 되는 상황이다.
그가 가지고 있던 것이 너무 많아서 그가 없음에 그 공허감을 누가 채워준단 말인가?
적당히 자신의 분량대로 조용히 살다 가는 것,
작은 아쉬움 남기고 가는 것이 좋겠다.
서로 공평하게 사는 것이 좋겠다.
적당히 존경을 나누고, 관심을 나누고, 힘을 나누고, 사랑을 나누는 그런 인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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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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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지도자(성직자)가 죽는, 아니 죽어야 하는 종교다.
위세를 얻고 섬김을 받는 자리에 앉는 것은 예수를 따르는 공동체가 아니다.
대접을 받고, 권세를 얻고, 마음껏 누리고 사는 것은 그저 종교인일 뿐 예수님의 제자는 아니다.
이는 카톨릭이나 정교회나 개신교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범기독교 집단들의 가장 큰 오류는 지도자가 죽지 않으려하는 것이다.
지도자의 위치가 공고해지면 공고해 질 수록 진리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
진리는 죽음으로 살아나는 것이니까.

예수가 만든 최초의 공동체 안에 예수는 죽었다.
그가 선택한 제자의 손에 의해.
진리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도전을 받고 죽음으로 말하는 것.
예수의 제자는 또다시 자신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공동체 안에서 가장 먼저 죽는 사람이다.
그렇게 죽어갈 때 그 모임은 진리를 지켜낼 수 있다.
죽지 않으면 사람이 남을 뿐이다.

죽지 않는 기독교,
그러므로 진리에서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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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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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이 닥치는 것을 원하는 사람은 없다.
아니 내가 그렇다. 죽지 않는 것을 원하지는 않지만, 아파하며 살고 싶지는 않다.
몸 상태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지만 실은 병들었다고 할까봐 두려워하고 있을 때가 더 많다고 해야 한다.

삶이 고통스럽지도, 불행하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정말!

그러나 오늘 헨리 나웬의 일기를 읽으면서 내가 당하는 고통에 대해서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의 불행과 고통이 복음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당하는 그 불행을 내가 만났을 때 뒷문이 아닌 앞문으로 당당히 맞을 수 있다면
고통 중에 있는 이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힘이 될 수 있을까?

헨리 나웬은 추기경인 조지프라는 사람이 암으로 입원해 있을 때 만났던 일들을 추억하며
그의 아픔을 넘어 죽음까지도 교회에 선물이 되겠다고 일면 가혹할 것 같은 말을 적고 있다.

9월 7일
나는 조지프와 함께 있으면서 그의 병과 언제 닥쳐올 수 있는 죽음이
오늘날 교회에 그가 선사하는 가장 큰 선물이 될 수도 있겠다는 깊은 확신이 들었다.
수많은 사람이 에이즈와 암, 기아와 전쟁과 폭력으로 죽어가고 있는데,
조지프의 병과 죽음이 아파하는 모든 사람을 진실로 배려하는 사목이 될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는 끔찍한 불행을 겪으실 때
그 고통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 보셨기에 그 사건은 우리에게 복음이 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오늘 나에게 일어나는 예기치 않은 불행도
그것을 맞이하는 나의 태도 여하에 따라 전혀 다른 반향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너무도 조심스럽지만, 나의 어떤 불행도 하나님께 유익하게 바꾸어내는 삶으로 당당히 나가고 싶다.
나의 죽음도 유익하다는 찬양의 가사처럼...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믿음을 허락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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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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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슬픈 일이 있었다.
어린이부 2학년 꼬마가 차 사고로 하나님 품으로 간 것이다.
후진하던 차량의 운전자의 부주의로 난 사고였다.

아홉살 꽃다운 나이에 우리의 곁을 떠난 아이...
매 주일 내가 만나는 아이들은 160명이 넘는다.
얼굴도 알고 이름도 알고 부모나 형편에 대해서 아는 아이들이 있지만,
그런 아이들은 소수이다.
겨우 이름을 90% 정도 알고 있을 뿐,
그 아이들에 대해 자세한 사항을 알진 못한다.

그 아이들 중에서도 이 친구는 그래도 이름도 알고,
성격이나 모습에 대해서 몇 마디 할 수 있는 아이였다.
이유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나오지만
형과 함께 워낙 개구장이여서 누구보다 빨리 파악이 된 친구였다.
또 담당 선생님이 매 주일 아침 전화를 해야 나온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 아이의 슬픈 소식은 여러가지로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매 주일 만나는 아이들이 어느 순간 어떤 일을 당할 지 알 수 없다는 것,
혹 아이들이 예배당에 왔다 가는 시간을 소중하게 만들어 주지 못한 것은 아닌지,
아이들에게 주님 안에서의 삶을 얼만큼 알려주었는지, 또 그렇게 살도록 했는지,
내가 나의 역할을 똑바로 하고 있는 것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돌아오는 주일부터 더 강하게 아이들에게 요청, 요구, 설득, 강조 해야 하나 라고...

그러나 무엇보다도 더 강렬하게 든 생각은
아홉살이란 나이에 하나님 품으로 간 것에 대한 생각이다.
이제 서른 일곱 해를 시작한 내 나이의 숫자의 의미가 크게 다가왔다.
마감되지 않고 해마다 더해지는 숫자들, 그것을 더해주시는 분의 뜻은 무엇일까.
결국 그 모든 의문의 짐은 남은 자들의 몫으로 남는 것이리라.
그 친구의 가족, 친구들, 그리고 나에게까지.

내일 설교 주제가 '찬양의 예배'이다.
그래서 더더욱 그 아이가 생각난다.
인생들의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나이의 숫자를 더할 수록 더 영악해질 뿐 순수함을 찾아 볼 수 없어 지지만,
그럴 수록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순수한 찬양을 더 받으시길 원하시지 않을까.
내가 그토록 꿈꾸며 이루려고 하는 것들이 한 순간에 사라지는 것인지도,
오로지 하나님을 향한 나의 마음이 남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이의 아버지가 사고를 낸 차량이 속한 고물상을 없애자는 서명운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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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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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에 들어서면서 두 분이 별세하셨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한 분은 대학 동기의 어머님이셨고, 다른 한 분은 예전에 있던 교회 선생님의 아버님이셨다.
친구의 어머님은 뵌 지 오래 되었지만 연세가 많지 않으시다는 것을 알기에 놀랐고,
선생님의 아버님은 지난주에 잠시 교회에 들렀을 때 먼발치에서 뵈었는데 별세하셨다고 해서 놀랐다.
그 때는 예전에 뵈었던 모습 그대로였는데 그렇게 갑자기 가실 수 있는가 싶었다.
그러니 가족들이야 얼마나 놀라고 슬픔이 클까.
문상을 가서 알았지만 친구 어머니도 갑자기 별세하신 것이란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을 당한 친구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래,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 중에 죽음을 예상하고 준비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리고 그의 가족들 역시 말이다.

죽음은 언제나 예고 없이 찾아온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은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심지어 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죽음보다는 삶을 더 그린다.
그래서 사람들은 삶을 정리하는데 있어서 미숙하다.
마치 영원히 살기라고 할 듯 이런 저런 감정들을 쌓아 놓고 산다.
죽음이 이르렀을 때 죽음에게, 남아 있는 자들에게 할 말도 미처 준비하지 못한 채.
예외적인 경우도 있겠지만...

그래서 내가 오늘 살아 있기 때문에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를 중심으로 돌고 있는 세상이 내가 없어도 전혀 이상 없이 움직일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고,
그러하기에 나에게 주어진 하루하루의 귀함을 알고
그 시간들을 소중하게 기억 속에 남겨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죽음을 준비하는 삶일 것이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시간에 끝을 생각할 수 있다면 함부로 살진 않을 것이다.
이름 하여 ‘인생의 끝에 서서 오늘을 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기치 않은 죽음, 급작스런 생의 마감은 없다.
이미 다 준비가 되어 있었으니까.
관계적 측면은 말할 것도 없고, 물질 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감정적 부분과 영적인 부분까지도.

자 이제 만나는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만나는 것처럼 정성을 다하고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오늘을 소중히 여기며 성실히 살아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누구도 소홀히 대할 수 없고, 일 분 일 초도 그냥 흘려보낼 수 없다.

2006.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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