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하나님을 지키는 용이 되게 해 주세요.
그리고 꼭 천국 가게 해 주세요.
그리고 절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3학년 꼬마가 쓴 기도문

아이들이 연초에 쓴 기도문을 정리하다 발견한 기발한 기도문이다.
하나님을 지키는 용이 되게 해 달라는 기도...
하나님께서 즐거워하실 것 같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지켜주시지만, 언젠가 하나님을 지켜드리겠다는 동심의 순수함이 담겨있다.
 

출11

3 여호와께서 그 백성으로 애굽 사람의 은혜를 받게 하셨고 또 그 사람 모세는 애굽 땅에 있는 바로의 신하와 백성의 눈에 아주 위대하게 보였더라


모세는 아무것도 없이 애굽으로 돌아왔다.

그에게 있는 것이라곤 늙은 몸을 의지한 지팡이와 하나님의 이끄심에도 불구하고 가득한 두려움뿐이었다.

그러나 6개월여의 시간이 흐른 지금, 그의 손엔 여전히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는 이제 애굽 땅에 있는 바로의 신하와 백성의 눈에 아주 위대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의 말, 몸짓이 애굽이라는 나라의 모든 사람의 초미의 관심사가 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신으로 자처하며 거드름을 피우던 바로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모세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까지도 애굽의 백성들에게 눈여겨 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되었다.

이는 은금 패물을 손쉽게 얻을 수 있도록 만드는 중요한 기반이 된다.

모세는 이쯤 되어서야 하나님께서 자신을 설득해 긴 여정이 이끌어 오신 이유를 알게 되었을까.


이렇듯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을 할 준비가 되었지만,

여전히 바로는 처음 그 태도를 조금도 바꾸지 않고 있다.

완고함으로 오기까지 부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는 바로와는 상관없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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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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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집에 도둑이 들었다.
어떻게 했는지 자물쇠 두 개를 모두 부수고 들어와서는
장롱과 서랍을 모두 열어 젖혀 두고 갔다.
결론은 도둑맞은 것이 없다는 거다.
훔쳐 갈 것이 없으니 가져 간 것도 없다.
뭔가 금붙이를 노린 것 같은데 도둑도 실망이 컸을 것 같다.
(참, 도둑 걱정을 하고 있네.)
뭔가 값비싼 것을 집에 두고 있다가 이럴 때 잃었다면
오늘 하루 동안 갑갑했겠지만, 그런 일이 생기지 않아 다행이다.
물론 현관 자물쇠 두 개를 모두 교체하는 비용은 들었지만.

물건에 마음을 붙여 놓았을 때 그 물건을 잃으면 마음도 잃게 되는 것 같다.
마음이 붙어버릴 만한 물건을 만들지 않는 것도 삶의 중요한 덕목이지 않을까.
좋은 경험 한건가?
유쾌하지만은 않은 경험이지만 경험을 통해 한 발짝 더 나아갈 수 있는 건 사실이다.
 

내가 경험하는 하나님

출10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에게로 들어가라 내가 그의 마음과 그의 신하들의 마음을 완강하게 함은 나의 표징을 그들 중에 보이기 위함이며

2 네게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들 곧 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행한 표징을 네 아들과 네 자손의 귀에 전하기 위함이라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사실 삼천년도 넘는 간극을 넘어서 출애굽기의 사건을 피부로 이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대개 이스라엘 사람들의 입장에서 재앙사건을 보기 때문에 편협한 견해를 가질 수도 있다.

열 가지 재앙을 표현하는 것에도 조금의 과장이 있을 수 있고,

그러므로 바로가 일련의 일들 가운데 자신의 마음을 완강하게 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재앙이 세 개가 남았다.

그 재앙 중 메뚜기 재앙과 흑암의 재앙이 본 장에서 애굽에 내린다.

무엇이든 적당 할 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지만,

조금이라도 지나쳐 과하게 되면 그것은 재앙이 된다.

비가 더 많이 온다든지, 바람이 더 많이 분다든지, 병충해가 더 많으면 재앙이 된다.

농업이 모든 것의 근간이었던 시절에 우박이나 메뚜기가 조금만 더 와도

실로 큰 재앙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재앙 하나하나를 놓고 논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모든 것들을 떠나서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강하게 인식시키시겠다는 것이었다.

이제까지 그들이 알고 있던 하나님은 조상의 하나님에 지나지 않았다.

다시 말해 그들의 조상들이 경험한 하나님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조상들조차 경험해 보지 못한 하나님 경험을 주고 계신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주시고자 6개월여의 의식을 진행하고 계신 것이다.

그들은 몸으로 하나님을 기억할 수 있으리라.


재앙들이 애굽 전역을 강타하면서도

유독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에는 영향을 주지 않았을 때,

그리고 이 현상이 모세라는 사람에 의해 일어나기도 잦아들기도 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역사의 변방에 있던 자신들이 역사의 중심으로,

주인공의 자리로 옮겨 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되심을 경험하는 삶이 더없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생각게 하는 기간이 열 가지 재앙의 시간이었듯이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경험하는 과정은 필수인 것 같다.


아홉 번째 재앙으로 흑암이 내린 것은 애굽의 사람들에게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보는 것을 멈추고 깊이 생각하라는 하나님의 배려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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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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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다면,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더 분명하게 이야기 해 달라고 부탁한다면,
선택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 지 이미 매뉴얼로 제시되어 있다면
걱정할 것이 없을 것 같다.
특히나 사람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문제들 앞에서는 거의 속수무책이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너무도 다양하고,
그 감정이라는 것이 심하게 변화무쌍하기 때문이다.
어떤 원리나 구조를 세우기가 불가능해 보인다.
그래서 기다리는 것이 상책일 때도 있다.

내가 나름대로 정한 원칙은
일단 최선의 선택을 하고, 시간이 지나 결과가 좋으면 잘한 선택이고,
결과가 좋지 못하면 반성은 하되 후회는 하지 말자는 것이다.

바로는 선택의 기로에 서서는 최악의 선택을 계속하고 있다.
나름대로는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하겠지만,
후회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이다.
 

무시되는 현실들 

출9

27 바로가 사람을 보내어 모세와 아론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이번은 내가 범죄하였노라 여호와는 의로우시고 나와 나의 백성은 악하도다

28 여호와께 구하여 이 우렛소리와 우박을 그만 그치게 하라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다시는 머물지 아니하리라

29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내가 성에서 나가서 곧 내 손을 여호와를 향하여 펴리니 그리하면 우렛소리가 그치고 우박이 다시 있지 아니할지라 세상이 여호와께 속한 줄을 왕이 알리이다

30 그러나 왕과 왕의 신하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아직도 두려워하지 아니할 줄을 내가 아나이다


모세는 신이 아니었고 사람이었다.

그가 과거에 어떤 신분이었는지를 떠나 지금은 명백하게 이스라엘 사람이고,

80살의 초라한 행색의 노인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당시 신으로 자처하던 바로나,

그의 주변에서 호사를 누리던 그 어떤 권세가들이 가진 권위 그 이상이었다.

그들이 가졌다고 자랑하던 것이 아무 것도 아님을 너무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 중심에 있는 바로가 끝내 회피하려는 현실, 그 현실이 진실임을 깨달았어야 했다.

어쩌면 바로는 자신을 신으로 추앙하는 거짓 현실에 휩싸여

진짜 현실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눈앞에 생생히 펼쳐질 때도

금방 지나가 버릴 것이라고, 눈속임이라고 자신을 속이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한 명의 착각 때문에 많은 백성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는

또 하나의 현실이 무시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런 일들은 현재 교회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일부 목회자들이 교회 안에서 누리는 (조금 과장해서) 절대 권력이

사회에서도 동일하게 통할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제왕적으로 누리는 힘을 현실로 여기다가

교회 밖으로부터 들려오는 비판을 부당하다고 몰아붙이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목회자들의 태도가 너무도 이질적으로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왜 바로를 이야기 하면서 일부 목회자들의 모습이 떠오르는 지 가슴 아프다.

나도 그 목회자들의 무리 가운데 있는 것인데...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하는 능력을 배양해야 한다.

자신을 둘러싼 인의 장막에 휩싸여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면 안 된다.

바로가 그 현실을 무시하고 있을 때

애굽에는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일곱 번째의 재앙으로

각각 가축의 죽음, 악성종기, 우박이 내려진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고센에는 내리지 않았다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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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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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빼먹지 않고 쓰려고 했는데 토요일과 주일에는 아무래도 무리인듯 하다.
주일은 주일 대로, 토요일은 주일을 준비해야 하니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다.

하나님이 이끄는 40년이라는 거창한 주제이지만,
실은 매일 성경을 읽고 싶은 나의 작은 소망이 담긴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어줍잖은 글이라도 매일 빠짐없이 기록을 남기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래도 어느정도 수준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을 해보지만,
욕심을 가지면 글을 올리는 것이 불가능해 질 것 같다.

나름 성경을 읽을 때 가지는 원칙을 정리해 보려고 하는데 그것도 여의치는 않다.
'돌소리의 직관으로 성경읽기'라고 해 볼까하는데, 말처럼 쉽지는 않다.

월요일이 다 가고 밤이 되서야 또 한 장을 마무리 한다.
 

시간의 주인

출8장

28 바로가 이르되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광야에서 제사를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 가지는 말라 그런즉 너희는 나를 위하여 간구하라

29 모세가 이르되 내가 왕을 떠나가서 여호와께 간구하리니 내일이면 파리 떼가 바로와 바로의 신하와 바로의 백성을 떠나려니와 바로는 이 백성을 보내어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일에 다시 거짓을 행하지 마소서 하고

30 모세가 바로를 떠나 나와서 여호와께 간구하니

31 여호와께서 모세의 말대로 하시니 그 파리 떼가 바로와 그의 신하와 그의 백성에게서 떠나니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32 그러나 바로가 이 때에도 그의 마음을 완강하게 하여 그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였더라


초라한 행색을 한 두 노인이 전하는 말을 듣게 된 바로의 기분은 어땠을까?

혹시 강대국의 사신이 대단한 위세로 수백 수천의 수행원을 대동하고 나타났다면,

그래서 그들이 전하는 선전포고를 접하는 자리에 있었다면 바로가 조금은 위축되었을까.

노예로 일하고 있는 자들이 보이지도 않는 자신들의 신이 자신들을 놓아주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바로는 그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않으셨더라도 대개의 절대 권력을 가진 왕들은 바로처럼 행동했을 것이다.

그런 사실을 뻔히 알고 계신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을 보내시면서 바로의 시건을 끌만한 그 어떤 것도 그들에게 덧입혀 주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선 굳이 그런 일을 하실 필요가 없으셨던 것 같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는 가장 효과적인 도구는

인간들의 눈을 휘둥그렇게 할 만한 그 어떤 화려한 장식이 위세가 아닌

‘하나님의 이름’과 ‘시간’이면 충분했다.

하나님의 이름이 전해지고, 그 이름을 통해 전해지는 말씀들이 현실로 드러날 때

그 누구도, 어떤 권력도 맥을 잃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역으로 시간이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간이 지나면 그 어떤 고통도, 두려운 일도 해소될 것이라고 믿는다.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갖고 사는 어리석은 인간의 행태이다.

바로는 모세와 아론을 통해 벌어지고 있는 재앙들이 그저 지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약간 귀찮은 일일뿐 그것으로 자신의 스타일을 구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조금 심하다 싶으면 그들을 불러 몇 마디 말로 달래서 중지 시키고,

또 그렇게 그 재앙이 멈추면 무시해 버리면 그만이다.

어떤 다급한 일이 있을 땐 달려와 무릎 꿇고 눈물범벅이 되어 기도하지만

그 일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지나가 버리면 또 등 돌리고 살아가는 대부분의 크리스천의 모습과도 닮아 있다.


이렇게 바로가 시간을 벌어주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애굽을 향한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의 재앙을 각각 개구리, 이, 파리로 내리신다.

하나님의 각본대로 바로는 재앙을 모면하기 위해서 모세와의 대화를 시도할 뿐

근본적인 마음의 변화는 일으키지 않는다.

자신들이 따라 할 수 없을 때에야 그나마 하나님을 인정하는 술객들이 어쩌면 그래도 지혜로운 것이다.


이런 시간의 과정을 통해 조금씩 하나님의 이름은 이스라엘 족속들의 마음속에 크게 자라고,

애굽의 백성들의 기억 속에 새겨지고, 주변의 나라들에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 가공할 재앙이 네 번째에 들어서면서 고센 땅이 구별된다는 것이 또 얼마나 놀라운 일이었을까?

이스라엘 족속들은 이제 자신들에게 임한 일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지켜보기만 하는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자신들을 향해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몸으로 느끼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그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분명하게 보고, 깨달아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모세에 대한 신뢰가 더욱 확고해 지고, 그가 명하는 것을 조금도 빠뜨림 없이 따르게 된다.

모세에 대한 믿음은 곧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직결될 것이다.


이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별하여 당신의 백성 삼으시려는 계획을 쉬지 않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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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의 이유


출7장
8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9 바로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이적을 보이라 하거든 너는 아론에게 말하기를 너의 지팡이를 들어서 바로 앞에 던지라 하라 그것이 뱀이 되리라

10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행하여 아론이 바로와 그의 신하 앞에 지팡이를 던지니 뱀이 된지라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며 일을 시작하신 것도 답답한 일인데,

그를 통해 일을 해 가시는 과정은 답답하다 못해 한심해 보인다.

대개 우리는 출애굽기의 이 부분을 읽으며 애굽에 내린 열 가지 재앙을 떠올리며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을 찬양한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어디 하나님이 그런 재앙을 내리셔야 하나님 되심이 드러나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그런 일을 하지 않으셔도 된다.

왜? 하나님이시니까.

오히려 ‘짜잔’하며 단칼에 무 자르듯 깔끔하게 처리해 버리시고는

별 일 아니었다고 말씀하시는 모습이 더 좋지 않을까.

뭐 하러 자신 없어하는 모세를 설득하고,

여전히 거리를 두고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시며

6개월이라는 시간을 지속한다는 말인가?

그러니 답답하다 못해 한심해 보이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모든 것을 아시면서도 애굽을 상대로,

아니 한 인간인 바로를 상대로 수개월에 걸친 지루한 싸움을 시작하신다.

말을 해 놓고 보니 ‘싸움’이라는 것도 말이 안 된다.

한 인간과 하나님이 싸움을 하다니.

하나님의 일방적인 후려치심이라고 하면 더 맞을 것 같다.

이 일련의 과정의 목적이 하나님의 이김에 있지는 않은 것 같다.

핵심은 하나님께 있는 것도 아니고, 바로에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자존감의 문제이다.

100년도 더 넘게 고통을 당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스로 존재감을 상실한 상태였다.

자신들이 누구인지, 왜 이 곳에 있는 지에 대한 질문조차 망각한 상태라 할 수 있다.

그런 그들을 이끌고 나가서 다른 보금자리를 마련해 준다고 해도

그들의 나약한 의식이 그들 스스로를 버텨내지 못하게 만들 것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스스로 손에 피를 묻히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하는 시간만큼, 아니 그 이상 고심하시고 준비하신 일이다.

도와주시려는 것이고, 기억에 남겨 주시려는 것이다.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시는 것이고,

그들의 마음속에 꽉 막혀 있는 한을 풀어 주시는 것이다.


그럼 억울한 애굽의 백성들은 어떻게 하나?

잘 살펴보면 그들에게도 기회는 있었다.

재앙은 때로 예고되었고, 그래서 그에 따른 준비를 할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기도 했다.

특히 열 번째 재앙은 피해갈 방법이 있음을 그들은 소문(언론?)을 통해 들었을 것이고,

사랑하는 가족을 잃지 않을 수도 있었다.

늘 듣지 않는 마음이 이스라엘 백성이든 애굽 백성이든 죽음을 재촉하는 것이다.


이제 시작된다.

하나님께서 직접 나서서 펼치시는 역사!

모세의 지팡이가 바닥에 던져질 때 어떤 소리가 났을까?

쨍? 탁? 턱? 텅? 쿵? 딱? 척? 짝?

그 소리가 어떻든지

바로와 그 신하들은 이 소리를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어야 했다.

만약 그렇다면 새로운 ‘시작’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절망적 ‘끝’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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