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차, 온따나스에서 보아디야 가는 길 29.5km(1) 


온따나스를 출발해 들어서게 되는 밭 사이의 좁은 길. 한 줄로 가는 길은 보폭의 차이로 서로를 불편하게 한다.


산 안똔 아치 Acro de San Anton

 




습관적으로 내 것, 네 것을 나누며 내 것에 집착한다. 배낭을 바닦에 내려 놓으려 해도 내 것은 먼지가 없는 곳을 골라서 놓고, 혹시나 긁히거나 이물질이 묻지 않도록 애지중지 한다. 한국사람, 아니 내가 그렇다는 말이다. 버스를 타며 화물칸에 싣게 될 때도 가방이 어디에 어떻게 놓이는지 관심 갖고 끝까지 지켜보고 올라간다. 반면 서양 사람들은 배낭을 화물칸 앞에 툭 던지곤 뒤도 안 돌아보고 버스에 오른다. 길을 걷다가도 힘들면 선채로 배낭을 벗어 땅바닥에 떨어뜨린다. 심지어 깔고 앉아버리기도 한다. 참 생각이 많이 다르다.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분명히 알고 있는 것 아닐까. 배낭, 짐 그까짓 거 소모품이라는 것을 아는 거다. 소유에 집착하는 내 모습과 대비되 많이 반성하게 된다.
2013.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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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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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1:35-39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쫓으시더라


예수님은 새벽에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다.

제자들은 그런 예수님을 따라가 사람들이 찾는다는 소식을 전한다.

이 장면을 요약하면 이렇다.

새벽 시간에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하고, 제자들은 사람들을 향하고 있었다고...


예수님은 아무리 일이 많고 피곤해도 하나님을 향하여 서는 것을 빼놓지 않으셨다.

이것은 당신의 사역을 하나님과의 연계성 속에서 이루어 가시려는 원칙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이 예수님을 더 예수님 되게 하는 과정이었다.

쉽게 말해, 예수님의 사역에는 사람들의 어떠함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 안전장치가 있었다는 얘기다.

안전장치라기보다는 하나님께 맞추어진 사역 매뉴얼이라고 하는 것이 더 맞다.

반면 예수님을 좇아와서 사람들이 찾는다는 얘기를 하는,

진짜일 가능성이 높지만, 과장하여 '모든 사람이 찾'는다고 말하는 제자들의 태도는

전적으로 사람에게 맞추어진, 사람을 향한 사역 태도를 반영하고 있다.


제자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는다는 소식을 예수님께 전하면서 뿌듯했을 것이고,

그렇게 인기있는 스승을 모시고 있다는 것에서 오는 자부심도 컸을 것이다.

인기라는 것은 그에 걸맞게 행동하는 것이 필요하다.

제자들은 아마도 그것을 예수님께 요구했을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찾나이다’라는 말은 제자들의 그런 마음이 실린 표현이다.

사실 오늘날 사역자들의 태도와 같은 것이 아닐까?

모든 사람이 '나를' 찾는 상황을 선망하며, 어떻게 하면 대중에게 어필할 수 있을 지를 고민하고 연출하지 않나.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의 부름, 그들의 시선을 만족시키기 위해 사역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부름, 하나님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나아가는 사역을 위해 애쓰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찾는 곳으로 돌아가지 않으시고

다시금 하나님께서 바라보고 계시는 곳, '다른 가까운 마을'로 옮겨 갈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만약 한 곳에 터를 잡고 몰려오는 사람들을 만나는 사역을 한다면 

오늘날처럼 대형교회를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사역은 하나님의 시선에서 벗어나는 것이 될 수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서선을 좇아 새로운 사람들을 찾아 나서신다.

이는 이른 새벽, 시간과 장소를 구별한 기도로 가능했던 일이 아니었을까.


사람들이 찾는 것에 부응하고, 그들의 시선을 만족시키려다가는 하나님의 시선을 놓치고 만다.

하나님의 부름, 하나님의 시선을 좇아가는 것이 먼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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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 여자에 대하여 예수께 여짜온대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

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복음서에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는 일이 많이 등장할까.

아마도 예수님을 찾은 이들 중에 병에 걸린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고,

질병이 그 때 사람들이 직면한 가장 긴급한 문제였다는 것을 뜻한다. (1)

예수님은 당신 앞에 나타난 사람들을 앞에 두고서 당시 종교지도자들처럼 논쟁하지 않으셨다.

배가 고픈 사람이 오면 빵을 주고, 아픈 사람이 오면 낫게 해 주셨다.

골치 아프게 이러쿵저러쿵 따지시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만나는 사람에게 맞추어 그 사람의 필요에 최선을 다해서 부응해 주신다.

당신의 행동이 누군가에게 거슬리는 것이 된다고 할지라도 아랑곳 하지 않으셨다.


만약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오신다면 성도들은 가장 먼저 무엇을 해 달라고 할까?

예수님 당시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일단 사람들은 자신들의 피부적 문제들을 누군가 해결해 주기를 원한다.

자기에게 아픔이 있거나 힘들 때 다른 이들, 다른 거시적인 문제들에 마음 쓰는 것이 어려운지도 모른다. (2)

과거나 오늘이나 예수님 앞에 선 사람들의 앞선 요청은 ‘저를 좀 낫게 해 주세요’ 일수밖에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질병의 문제는 사회정의의 문제와도 닿아 있다. (3)

그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낫기를 구하는 병들을 보면 대개 사회적으로 차별받는 이들,

소외된 이들에게서 주로 발병하는 것일 경우가 많다.

정서적으로 따돌림을 당함으로 인해 겪게 되는 어려움들인 경우도 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질병을 고쳐주지만

실제로는 그들의 상한 마음(심령)에 대한 치유를 시도하신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을 단지 병을 낫게 해 주시는 분으로만 한정하면 곤란한 것이다.

사실 예수님의 사역은 질병의 문제 너머에 있었다.

만약 예수님이 가신 길을 좇아가려는 제자라면 예수님이 어디를 바라보시고 나아가고 계신지를 알아야 한다. (4)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의식이 조금이라도 깨어나기를 원하셨던 것이 아닐까.

자신의 문제에만 갇혀 있지 말고, 예수님처럼 좀 더 차원 높은 삶의 이야기에 접속하기를 바라셨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제자들조차 그러지 못한 것 같다. 예수님 사후에나 가능했던 일들이다.


아무튼 예수님의 사역을 보면, 예수님께서 해결하셔야 했던 당면과제들의 스케일이 점점 커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역 초반에서 질병을 고치는 것에 있었지만,

조금씩 오버랩 되면서 좀 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결국에는 하나님의 영역의 문제들에 직면하셨다.

질병에서 율법의 문제로, 또 다시 민족적 문제들로, 또 다시 하나님의 사랑으로 확장되었다.


예수님을 만나는 우리의 모습도 이 단계를 거치는 것 같다.

내 몸의 문제, 집안의 문제, 사회의 문제, 국가와 전 우주적 차원으로까지

그런데 우리는 평~생 내 문제에만 매어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나 늘 자신이라는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마가복음 1장에 머물러 병을 고침 받는 것이 전부인것처럼 여긴다.

그러면 더이상 예수님과의 동행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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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차, 부르고스에서 온따나스 가는 길 29.6km(2) 





오르니오스 들어가 첫번째 바의 벽에 여러 나라의 시간을 알리는 시계가 걸렸있다. 한국도 당당히!




서양인들도 돌을 쌓는 것은 매 한가지. 마치 한복을 입은 아낙네 같은 모습이다.


온따나스 들어가는 길




메세따는 스페인어 책상에서 왔다고 한다. 높고 평평한 지형(고위평탄면)이 스페인의 메세따이다. 나무가 없고 대부분 밀밭이어서 덥고 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선이 펼쳐진 곳이다. 그래서 까미노에서 힘든 구간 중 하나이고, 몇몇 순례자들은 부르고스에서 버스를 타고 메세따를 건너뛰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나에겐 까미노의 그 어느 곳보다 더 기억에 남고, 다시 걷고 싶은 길이 메세따의 까미노이다. 누구에겐 지루하고 덥고 고된 길이지만, 나에겐 시원하게 탁 트인 자유의 공간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내가 선 곳, 아니 내가 바로 끝이고 그렇기에 또다시 시작이라는 뜻이 아닐까. 길이 나로부터 시작해 나에게서 끝난다는 사실을 메세따는 분명하게 가르쳐준다. 나에게로 향하는 순례의 여정이 더 깊어지고 있다.
2013.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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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차, 부르고스에서 온따나스 가는 길 29.6km(1) 


해도 뜨기 전에 부르고스 숙소를 나선 순례자들



드디어 메세따(고위평탄면) 지형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드디어 메세따 지대에 올라섰다. 양과 목자와 한 그루의 나무...


아가씨들인줄 알았는데...


까미노를 걷는 것도 여행의 하나라면 참 고된 여행이다. 걷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매일 머무는 곳이 바뀌니 매번 새로운 숙소를 찾아 묶어야 하는 것이 참 고역이다. 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고 아침이면 짐을 꾸려 짊어지고 어둠 속으로 길을 나선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런 생활도 열흘이 넘고 또 며칠이 지나면서 익숙해지고 있는 거다. 
아침에 눈을 뜨면 거의 자동적으로 침대 난간에 널어둔 옷가지와 취침을 위한 소품들을 챙겨 배낭을 꾸려놓고, 화장실을 다녀와서는 발에 바세린을 바르고 양말을 신는다. 이어서 로비나 식당에서 서거나 앉아 전날 준비해둔 먹거리로 간단히 요기를 한다. 그리곤 캡라이트를 모자에 끼우고 배낭을 짊어지고 스틱을 들고 밖으로 나간다. 밝은 날에도 가끔은 헷갈리는 길을 어둠 속에서도 성큼성큼 발걸음을 재촉한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무디어지는 것일 수도 있지만, 까미노에서는 거의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 가운데 새로운 곳으로 이동하는 긴장이라는 안정장치가 있어 그 익숙함에 빠져버리진 않는다.
2013.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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