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고 싫고에 의해 행동을 결정할 때는 지난 것 같다.
정황을 봐서 옳다고 여겨지는 일을 해야 한다.
여러 일들이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부모님과 관련된 일이 그렇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부모님의 마음을 먼저 배려하고
그 분들이 서실 자리를 미리 마련해 드려야 한다.
혹시 내가 내키지 않는다고, 싫다고 해서 머뭇거리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돈이 드는 일이어도 그렇고,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는 일이어도 그렇다.
자식된 도리라는 표현을 빌려오지 않더라도
내가 이루고 싶은 가족이라는 그림을 떠올려 보더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 맞다.

하나님에 대한 태도 역시 나의 '기호'에 따라 가변적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상황에 따라 변덕을 부리는 것 또한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요청이 '제발 마음을 굳게 하라는 것'이 아니었을까.
 

시험의 목적

출15

22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23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24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25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임하는 고통의 문제는 무엇일까?

왜 하나님을 잘 믿고, 더구나 그 분의 영광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임하는 어려움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스라엘 백성들, 그들은 실로 놀라운 일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아마 체험을 이야기 하라면 3박4일도 모자라 녹취해서 책으로라도 내야 할 판이었습니다.

그런 흥분되는 시간을 지나고 그들이 마주해야 했던 ‘현실’은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그들의 길은 이름만 달리할 뿐 광야의 연속이었고,

광야는 곧 결핍이라는 단어와 같은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수르광야를 지나며 3,4일 물의 결핍을 경험할 때 과연 그것을 신앙의 이름으로만 버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타는 목마름 속에서 그 입으로 한 결 같이 하나님을 찬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 하는 시간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있으셨을까?

이건 지금의 독자의 물음이기도 하지만, 그 현장에서 온 몸으로 겪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애타는 물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대답은 ‘시험’이라고 간단히 나옵니다.

하나님의 법도와 율례를 따르는지를 보시겠다는 것입니다.

아직 구체적인 그 무엇도 주시지 않은 상황에서 뭘 따르라는 말씀인지 다소 생뚱맞긴 하지만,

중요한 점은 그들의 고통의 시간에 하나님이 휴가를 떠나신 것은 절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고통의 상황 중에서 바른 선택을 해 주기를 바라시는 마음 가득 담아서 말입니다.

다소 가혹한 감이 없진 않지만 하나님은 시련을 통해 당신의 사람들을 단련하시는 것 같습니다.

상황이 어떻게 달라지고, 불리해 지더라도 흔들림 없이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 주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목마름의 시간이 주어질 때, 그래서 하나님의 부재가 더 느껴질 때,

오히려 하나님이 더 가까이 계시다는 것을 느끼는 것,

그래서 삶의 태도를 흐트러트리지 않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시험을 통해 이르고자 하시는 목적 지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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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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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백인 학교에 아메리카 인디언 자녀들이 전학을 왔습니다.
몇 개월 공부하고 나서 선생님이 "애들아, 시험 칠 준비해라" 했더니,
백인 아이들이 전부 옆에 가방을 다 올렸는데 아메리카 인디언 아이들은 둥그렇게 앉더랍니다.
"애들아, 너희들 시험 친다고 했는데 왜 둥그렇게 앉냐?"
그랬더니 그 인디언 아이들이 그러더랍니다.
"우리는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이렇게 서로 의논해서 풀라고 배웠는데요."

작은책 4월호 '엮은이가 독자에게' 중에서
 

패자에서 승자로

출14

10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11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12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출애굽이라는 위대한 현장에 있긴 했지만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불완전 했습니다.

이유는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에게 있었습니다.

실로 감격스러운 일들을 겪으며 애굽을 탈출해 나오기는 했지만

백성들의 마음속에 자리한 가장 중요한 동기는 ‘두려움’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백성들은 하나님에 막연한 두려움에 모세를 따라왔을 뿐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상황에 대한 정확한 판단을 할 만큼의 능력이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앞길을 막는 홍해 앞에서 불평하며 되돌아가겠다고 아우성을 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이 들 듯

바로에겐 쫓아낸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잡아오고자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바로와의 일전을 준비하고 있으시다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앞 광야에 갇혀 있다고 만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애굽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단절을 위한 거대한 의식이었습니다.

홍해 사건을 통해 백성들의 기억 속에 애굽은 다시 돌아 갈 수 없는 곳이라는 것을 새기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보내신 열 가지 재앙을 통해 애굽을 혼쭐을 내고 나오기는 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전히 애굽을 자신들이 노예생활을 했던 곳으로 기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완전 무장한 애굽의 군대가 눈앞에서 생생하게 사라져 가는 모습을 지켜볼 때

출애굽은 노예의 신분으로 쫓겨난 사건이 아닌 전쟁에서 승리한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이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은 승자가 됩니다.

더불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이끌어 내셔서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려는 의지가 얼마나 강하신지를 똑똑히 체험했습니다.


홍해를 건넘으로 인해 그들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확실하게 건넌 것이고,

이제 이들에게 남은 일은 앞으로 나가기만 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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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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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들의 설교를 듣다가 보면 똑같은 문제에 대해 전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보게 된다.
어떤 언어를 사용하느냐는 삶을 대하는 태도와도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그 중에서 극명하게 다르게 드러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고민이나 고통 등 삶의 문제들을 어떻게 상대하느냐는 것으로 나타난다.

1. 고민이나 고통을 책임과 의무로 여기고 짊어져야 한다
2. 고민이나 고통을 친구로 여기고 삶을 즐겨야 한다.

짊어지느냐, 즐기느냐는 마음에 달린 것 같다.
이제까지 짊어지는 삶이었다면, 이젠 즐기는 삶을 살고 싶다.
그런데 사실 그것이 더 어려워 보인다.
약간은 진지함의 관성이 있기에...
 

준비를 위한 준비

출13

19 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가졌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하게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너희는 내 유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더라

20 그들이 숙곳을 떠나서 광야 끝 에담에 장막을 치니

21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22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요셉에 의해 시작된 이스라엘의 자손들의 애굽생활이 막을 내리고 있습니다.

70명으로 시작한 그들이 한 민족이 되어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거니와

이제는 하나님의 명실상부한 선택된 민족으로서 첫발을 내디디는 모습이 가슴 벅찬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전까지는 어렴풋한 하나님에서

구체적으로 체험한 하나님과 함께 시작하는 발걸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것을 빠짐없이 실천한 사람들만이 이 대열에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유월절을 시작으로 일주일간의 무교절을 지킨 사람들이고,

앞으로도 매 년 반복해서 이 구원의 사건을 되새길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들은 이 절기를 지키며 자신들이 어떤 백성인지,

어떻게 자신들이 시작되었는지를 전하고 또 전할 것입니다.


주목해서 볼 일은 이들이 창세기 50장에서 요셉이 임종하며 형제들에게 명했던 일,

즉 요셉 자신의 해골을 매고 올라가라고 맹세시킨 일을 실천한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모세를 통해 이 모든 일들이 주도되고 있지만,

결국 요셉으로 시작되어 요셉으로 마무리 된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가 아버지 야곱의 장례를 치르며 보여주었던 출애굽의 밑그림이 성취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대의 행진도 아니고, 급하게 출발한 그 길이 얼마나 막막했을 지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여인들, 어린이들, 노인들이 뒤 섞이고, 짐승들과 짐수레들의 행렬이

오히려 그들을 낙담하게 하지는 않았을까요?

더구나 어느 길로 가야하는지도 명확하게 알지 못하고 그냥 앞 사람만 따라 가야 했다면 말입니다.

그런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것이 있었으니,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을 낮의 더위와 밤의 추위에서 지켜주는 것 이상으로 큰 위안이 되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정처 없이 버려진 것이 아닐까 싶은 마음을 크게 잡아 주는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은 이제까지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한 준비의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애굽을 떠났고, 또 그 과정에서 주변 세계에 그들의 존재가 충분히 알려져서

환경적 준비는 다 되었을지 몰라도, 정작 준비되어야 할 정신의 훈련이

광야의 시간들을 통해 시험받고, 더 단단해 지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백성들의 마음속에서 기대감이 더 크게 자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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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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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내 내 몸을 따듯하게 해 주었던 옷들을 세탁을 하고, 접어서 장롱 서랍에 넣었다.
좀 섭섭하고 미안한 생각도 들지만 그렇다고 계속 밖에 걸어 둘 수는 없다.
때가 되면 들어가고 좀 더 얇은 옷가지들이 밖으로 나와야 한다.
만약 그러지 않고 따듯해진 날에도 두꺼운 겨울 옷을 입고 다닌다면
사람들의 비웃음보다 흘러내리는 땀 때문에 곤욕을 치러야 할 거다.
계절이 바뀌면 자연스럽게 바꾸어 입어야 하는 데
여전히 과거의 것들을 고집하면 남들에게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곤란한 일이 되고 만다.
익숙하다고, 편하다고 뒤로 물러서기만 한다면 더이상 발전은 없다.

모세는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입고 있던 애굽이라는 옷을 6개월 동안 벗겨주려고 애쓴 것 같다.
그 결정적 순간이 바로 출애굽기 12장의 사건이 아닐까.
오늘 묵은 옷들을 꺼내 세탁을 하고 장롱에 넣으면서
옷의 변화 만큼이나 마음의 변화 또한 소망해 본다.
 

보고, 듣고, 만지다

출12

5 너희 어린 양은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

6 이 달 열나흗날까지 간직하였다가 해 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7 그 피를 양을 먹을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8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9 날것으로나 물에 삶아서 먹지 말고 머리와 다리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

10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며 아침까지 남은 것은 곧 불사르라

11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양고기, 문설주, 무교병, 쓴 나물, 띠, 지팡이...
성경 특히 구약성경을 읽으면서 명심해야 할 것 중 하나가 있다면

성경의 말씀들이 오늘날의 사람들을 생각하며 쓰여 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글자 한 글자 기록되었다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가끔 왜 이런 것을 자세히 쓰고 있는지 의아스러울 땐 이스라엘의 후손의 마음으로 읽으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 내리는 마지막 재앙을 준비하시는데

하나님과 모세와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백성들과 함께하십니다.

그 과정을 통해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시작점을 찍으려 하시고,

또 그 시작점을 매 해 기념하며 기억하도록 하려고 하십니다.

그 기억은 곧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직결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정성스럽게 하나하나 지시하십니다.

뭐 굳이 백성들이 이런 일들을 할 필요가 있을까 싶은 일들을 빠짐없이 이르고 계십니다.

그냥 서둘러 재앙을 내리시고 바로로 하여금 쫓아내도록 하셔도 되셨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시며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여금 규정에 따라 절차를 밟도록 하십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이후 하나님으로부터 받게 되는 율법의 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율법이 시작, 즉 유월절의 시작은 공감각을 이용하도록 하십니다.

보고, 듣고, 만지는 생생한 경험으로 통해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몸에 새기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후 어떤 일을 당할 때 그 때의 그 경험을 떠올리며

자신들을 구하신 하나님께서 오늘도 자신들을 구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양을 고르고, 양과 시간을 보낸 후, 그 양을 잡아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고기는 나누어 먹고, 더불어 쓴 나물과 무교병을 먹는데,

손에는 지팡이를 잡고, 급하게 먹어야 합니다.

누구라서 이런 장면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초월해 계시는 어떤 분으로만 생각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하나님은 너무도 생생하게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지는 그 모든 것을 통해

오늘도 우리들을 만나고 계시고, 그 가운데 기억하기를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에게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출애굽기 12장의 하나님은 더없이 강한 분이시지만 섬세한 사랑의 마음을 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매 년 유월절을 통해 전하며 기억해야 합니다.


(설교체로 바꿈, 이렇게 쓰는 것이 더 쉬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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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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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하나님을 지키는 용이 되게 해 주세요.
그리고 꼭 천국 가게 해 주세요.
그리고 절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3학년 꼬마가 쓴 기도문

아이들이 연초에 쓴 기도문을 정리하다 발견한 기발한 기도문이다.
하나님을 지키는 용이 되게 해 달라는 기도...
하나님께서 즐거워하실 것 같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지켜주시지만, 언젠가 하나님을 지켜드리겠다는 동심의 순수함이 담겨있다.
 

출11

3 여호와께서 그 백성으로 애굽 사람의 은혜를 받게 하셨고 또 그 사람 모세는 애굽 땅에 있는 바로의 신하와 백성의 눈에 아주 위대하게 보였더라


모세는 아무것도 없이 애굽으로 돌아왔다.

그에게 있는 것이라곤 늙은 몸을 의지한 지팡이와 하나님의 이끄심에도 불구하고 가득한 두려움뿐이었다.

그러나 6개월여의 시간이 흐른 지금, 그의 손엔 여전히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는 이제 애굽 땅에 있는 바로의 신하와 백성의 눈에 아주 위대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의 말, 몸짓이 애굽이라는 나라의 모든 사람의 초미의 관심사가 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신으로 자처하며 거드름을 피우던 바로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모세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까지도 애굽의 백성들에게 눈여겨 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되었다.

이는 은금 패물을 손쉽게 얻을 수 있도록 만드는 중요한 기반이 된다.

모세는 이쯤 되어서야 하나님께서 자신을 설득해 긴 여정이 이끌어 오신 이유를 알게 되었을까.


이렇듯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을 할 준비가 되었지만,

여전히 바로는 처음 그 태도를 조금도 바꾸지 않고 있다.

완고함으로 오기까지 부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는 바로와는 상관없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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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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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집에 도둑이 들었다.
어떻게 했는지 자물쇠 두 개를 모두 부수고 들어와서는
장롱과 서랍을 모두 열어 젖혀 두고 갔다.
결론은 도둑맞은 것이 없다는 거다.
훔쳐 갈 것이 없으니 가져 간 것도 없다.
뭔가 금붙이를 노린 것 같은데 도둑도 실망이 컸을 것 같다.
(참, 도둑 걱정을 하고 있네.)
뭔가 값비싼 것을 집에 두고 있다가 이럴 때 잃었다면
오늘 하루 동안 갑갑했겠지만, 그런 일이 생기지 않아 다행이다.
물론 현관 자물쇠 두 개를 모두 교체하는 비용은 들었지만.

물건에 마음을 붙여 놓았을 때 그 물건을 잃으면 마음도 잃게 되는 것 같다.
마음이 붙어버릴 만한 물건을 만들지 않는 것도 삶의 중요한 덕목이지 않을까.
좋은 경험 한건가?
유쾌하지만은 않은 경험이지만 경험을 통해 한 발짝 더 나아갈 수 있는 건 사실이다.
 

내가 경험하는 하나님

출10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에게로 들어가라 내가 그의 마음과 그의 신하들의 마음을 완강하게 함은 나의 표징을 그들 중에 보이기 위함이며

2 네게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들 곧 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행한 표징을 네 아들과 네 자손의 귀에 전하기 위함이라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사실 삼천년도 넘는 간극을 넘어서 출애굽기의 사건을 피부로 이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대개 이스라엘 사람들의 입장에서 재앙사건을 보기 때문에 편협한 견해를 가질 수도 있다.

열 가지 재앙을 표현하는 것에도 조금의 과장이 있을 수 있고,

그러므로 바로가 일련의 일들 가운데 자신의 마음을 완강하게 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재앙이 세 개가 남았다.

그 재앙 중 메뚜기 재앙과 흑암의 재앙이 본 장에서 애굽에 내린다.

무엇이든 적당 할 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지만,

조금이라도 지나쳐 과하게 되면 그것은 재앙이 된다.

비가 더 많이 온다든지, 바람이 더 많이 분다든지, 병충해가 더 많으면 재앙이 된다.

농업이 모든 것의 근간이었던 시절에 우박이나 메뚜기가 조금만 더 와도

실로 큰 재앙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재앙 하나하나를 놓고 논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모든 것들을 떠나서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강하게 인식시키시겠다는 것이었다.

이제까지 그들이 알고 있던 하나님은 조상의 하나님에 지나지 않았다.

다시 말해 그들의 조상들이 경험한 하나님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조상들조차 경험해 보지 못한 하나님 경험을 주고 계신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주시고자 6개월여의 의식을 진행하고 계신 것이다.

그들은 몸으로 하나님을 기억할 수 있으리라.


재앙들이 애굽 전역을 강타하면서도

유독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에는 영향을 주지 않았을 때,

그리고 이 현상이 모세라는 사람에 의해 일어나기도 잦아들기도 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역사의 변방에 있던 자신들이 역사의 중심으로,

주인공의 자리로 옮겨 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되심을 경험하는 삶이 더없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생각게 하는 기간이 열 가지 재앙의 시간이었듯이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경험하는 과정은 필수인 것 같다.


아홉 번째 재앙으로 흑암이 내린 것은 애굽의 사람들에게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보는 것을 멈추고 깊이 생각하라는 하나님의 배려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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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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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다면,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더 분명하게 이야기 해 달라고 부탁한다면,
선택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 지 이미 매뉴얼로 제시되어 있다면
걱정할 것이 없을 것 같다.
특히나 사람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문제들 앞에서는 거의 속수무책이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너무도 다양하고,
그 감정이라는 것이 심하게 변화무쌍하기 때문이다.
어떤 원리나 구조를 세우기가 불가능해 보인다.
그래서 기다리는 것이 상책일 때도 있다.

내가 나름대로 정한 원칙은
일단 최선의 선택을 하고, 시간이 지나 결과가 좋으면 잘한 선택이고,
결과가 좋지 못하면 반성은 하되 후회는 하지 말자는 것이다.

바로는 선택의 기로에 서서는 최악의 선택을 계속하고 있다.
나름대로는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하겠지만,
후회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이다.
 

무시되는 현실들 

출9

27 바로가 사람을 보내어 모세와 아론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이번은 내가 범죄하였노라 여호와는 의로우시고 나와 나의 백성은 악하도다

28 여호와께 구하여 이 우렛소리와 우박을 그만 그치게 하라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다시는 머물지 아니하리라

29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내가 성에서 나가서 곧 내 손을 여호와를 향하여 펴리니 그리하면 우렛소리가 그치고 우박이 다시 있지 아니할지라 세상이 여호와께 속한 줄을 왕이 알리이다

30 그러나 왕과 왕의 신하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아직도 두려워하지 아니할 줄을 내가 아나이다


모세는 신이 아니었고 사람이었다.

그가 과거에 어떤 신분이었는지를 떠나 지금은 명백하게 이스라엘 사람이고,

80살의 초라한 행색의 노인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당시 신으로 자처하던 바로나,

그의 주변에서 호사를 누리던 그 어떤 권세가들이 가진 권위 그 이상이었다.

그들이 가졌다고 자랑하던 것이 아무 것도 아님을 너무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 중심에 있는 바로가 끝내 회피하려는 현실, 그 현실이 진실임을 깨달았어야 했다.

어쩌면 바로는 자신을 신으로 추앙하는 거짓 현실에 휩싸여

진짜 현실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눈앞에 생생히 펼쳐질 때도

금방 지나가 버릴 것이라고, 눈속임이라고 자신을 속이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한 명의 착각 때문에 많은 백성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는

또 하나의 현실이 무시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런 일들은 현재 교회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일부 목회자들이 교회 안에서 누리는 (조금 과장해서) 절대 권력이

사회에서도 동일하게 통할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제왕적으로 누리는 힘을 현실로 여기다가

교회 밖으로부터 들려오는 비판을 부당하다고 몰아붙이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목회자들의 태도가 너무도 이질적으로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왜 바로를 이야기 하면서 일부 목회자들의 모습이 떠오르는 지 가슴 아프다.

나도 그 목회자들의 무리 가운데 있는 것인데...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하는 능력을 배양해야 한다.

자신을 둘러싼 인의 장막에 휩싸여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면 안 된다.

바로가 그 현실을 무시하고 있을 때

애굽에는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일곱 번째의 재앙으로

각각 가축의 죽음, 악성종기, 우박이 내려진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고센에는 내리지 않았다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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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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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빼먹지 않고 쓰려고 했는데 토요일과 주일에는 아무래도 무리인듯 하다.
주일은 주일 대로, 토요일은 주일을 준비해야 하니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다.

하나님이 이끄는 40년이라는 거창한 주제이지만,
실은 매일 성경을 읽고 싶은 나의 작은 소망이 담긴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어줍잖은 글이라도 매일 빠짐없이 기록을 남기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래도 어느정도 수준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을 해보지만,
욕심을 가지면 글을 올리는 것이 불가능해 질 것 같다.

나름 성경을 읽을 때 가지는 원칙을 정리해 보려고 하는데 그것도 여의치는 않다.
'돌소리의 직관으로 성경읽기'라고 해 볼까하는데, 말처럼 쉽지는 않다.

월요일이 다 가고 밤이 되서야 또 한 장을 마무리 한다.
 

시간의 주인

출8장

28 바로가 이르되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광야에서 제사를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 가지는 말라 그런즉 너희는 나를 위하여 간구하라

29 모세가 이르되 내가 왕을 떠나가서 여호와께 간구하리니 내일이면 파리 떼가 바로와 바로의 신하와 바로의 백성을 떠나려니와 바로는 이 백성을 보내어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일에 다시 거짓을 행하지 마소서 하고

30 모세가 바로를 떠나 나와서 여호와께 간구하니

31 여호와께서 모세의 말대로 하시니 그 파리 떼가 바로와 그의 신하와 그의 백성에게서 떠나니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32 그러나 바로가 이 때에도 그의 마음을 완강하게 하여 그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였더라


초라한 행색을 한 두 노인이 전하는 말을 듣게 된 바로의 기분은 어땠을까?

혹시 강대국의 사신이 대단한 위세로 수백 수천의 수행원을 대동하고 나타났다면,

그래서 그들이 전하는 선전포고를 접하는 자리에 있었다면 바로가 조금은 위축되었을까.

노예로 일하고 있는 자들이 보이지도 않는 자신들의 신이 자신들을 놓아주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바로는 그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않으셨더라도 대개의 절대 권력을 가진 왕들은 바로처럼 행동했을 것이다.

그런 사실을 뻔히 알고 계신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을 보내시면서 바로의 시건을 끌만한 그 어떤 것도 그들에게 덧입혀 주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선 굳이 그런 일을 하실 필요가 없으셨던 것 같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는 가장 효과적인 도구는

인간들의 눈을 휘둥그렇게 할 만한 그 어떤 화려한 장식이 위세가 아닌

‘하나님의 이름’과 ‘시간’이면 충분했다.

하나님의 이름이 전해지고, 그 이름을 통해 전해지는 말씀들이 현실로 드러날 때

그 누구도, 어떤 권력도 맥을 잃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역으로 시간이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간이 지나면 그 어떤 고통도, 두려운 일도 해소될 것이라고 믿는다.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갖고 사는 어리석은 인간의 행태이다.

바로는 모세와 아론을 통해 벌어지고 있는 재앙들이 그저 지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약간 귀찮은 일일뿐 그것으로 자신의 스타일을 구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조금 심하다 싶으면 그들을 불러 몇 마디 말로 달래서 중지 시키고,

또 그렇게 그 재앙이 멈추면 무시해 버리면 그만이다.

어떤 다급한 일이 있을 땐 달려와 무릎 꿇고 눈물범벅이 되어 기도하지만

그 일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지나가 버리면 또 등 돌리고 살아가는 대부분의 크리스천의 모습과도 닮아 있다.


이렇게 바로가 시간을 벌어주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애굽을 향한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의 재앙을 각각 개구리, 이, 파리로 내리신다.

하나님의 각본대로 바로는 재앙을 모면하기 위해서 모세와의 대화를 시도할 뿐

근본적인 마음의 변화는 일으키지 않는다.

자신들이 따라 할 수 없을 때에야 그나마 하나님을 인정하는 술객들이 어쩌면 그래도 지혜로운 것이다.


이런 시간의 과정을 통해 조금씩 하나님의 이름은 이스라엘 족속들의 마음속에 크게 자라고,

애굽의 백성들의 기억 속에 새겨지고, 주변의 나라들에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 가공할 재앙이 네 번째에 들어서면서 고센 땅이 구별된다는 것이 또 얼마나 놀라운 일이었을까?

이스라엘 족속들은 이제 자신들에게 임한 일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지켜보기만 하는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자신들을 향해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몸으로 느끼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그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분명하게 보고, 깨달아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모세에 대한 신뢰가 더욱 확고해 지고, 그가 명하는 것을 조금도 빠뜨림 없이 따르게 된다.

모세에 대한 믿음은 곧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직결될 것이다.


이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별하여 당신의 백성 삼으시려는 계획을 쉬지 않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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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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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의 이유


출7장
8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9 바로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이적을 보이라 하거든 너는 아론에게 말하기를 너의 지팡이를 들어서 바로 앞에 던지라 하라 그것이 뱀이 되리라

10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행하여 아론이 바로와 그의 신하 앞에 지팡이를 던지니 뱀이 된지라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며 일을 시작하신 것도 답답한 일인데,

그를 통해 일을 해 가시는 과정은 답답하다 못해 한심해 보인다.

대개 우리는 출애굽기의 이 부분을 읽으며 애굽에 내린 열 가지 재앙을 떠올리며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을 찬양한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어디 하나님이 그런 재앙을 내리셔야 하나님 되심이 드러나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그런 일을 하지 않으셔도 된다.

왜? 하나님이시니까.

오히려 ‘짜잔’하며 단칼에 무 자르듯 깔끔하게 처리해 버리시고는

별 일 아니었다고 말씀하시는 모습이 더 좋지 않을까.

뭐 하러 자신 없어하는 모세를 설득하고,

여전히 거리를 두고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시며

6개월이라는 시간을 지속한다는 말인가?

그러니 답답하다 못해 한심해 보이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모든 것을 아시면서도 애굽을 상대로,

아니 한 인간인 바로를 상대로 수개월에 걸친 지루한 싸움을 시작하신다.

말을 해 놓고 보니 ‘싸움’이라는 것도 말이 안 된다.

한 인간과 하나님이 싸움을 하다니.

하나님의 일방적인 후려치심이라고 하면 더 맞을 것 같다.

이 일련의 과정의 목적이 하나님의 이김에 있지는 않은 것 같다.

핵심은 하나님께 있는 것도 아니고, 바로에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자존감의 문제이다.

100년도 더 넘게 고통을 당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스로 존재감을 상실한 상태였다.

자신들이 누구인지, 왜 이 곳에 있는 지에 대한 질문조차 망각한 상태라 할 수 있다.

그런 그들을 이끌고 나가서 다른 보금자리를 마련해 준다고 해도

그들의 나약한 의식이 그들 스스로를 버텨내지 못하게 만들 것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스스로 손에 피를 묻히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하는 시간만큼, 아니 그 이상 고심하시고 준비하신 일이다.

도와주시려는 것이고, 기억에 남겨 주시려는 것이다.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시는 것이고,

그들의 마음속에 꽉 막혀 있는 한을 풀어 주시는 것이다.


그럼 억울한 애굽의 백성들은 어떻게 하나?

잘 살펴보면 그들에게도 기회는 있었다.

재앙은 때로 예고되었고, 그래서 그에 따른 준비를 할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기도 했다.

특히 열 번째 재앙은 피해갈 방법이 있음을 그들은 소문(언론?)을 통해 들었을 것이고,

사랑하는 가족을 잃지 않을 수도 있었다.

늘 듣지 않는 마음이 이스라엘 백성이든 애굽 백성이든 죽음을 재촉하는 것이다.


이제 시작된다.

하나님께서 직접 나서서 펼치시는 역사!

모세의 지팡이가 바닥에 던져질 때 어떤 소리가 났을까?

쨍? 탁? 턱? 텅? 쿵? 딱? 척? 짝?

그 소리가 어떻든지

바로와 그 신하들은 이 소리를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어야 했다.

만약 그렇다면 새로운 ‘시작’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절망적 ‘끝’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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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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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정을 따르기 보다는 인정을 따르는 것이 더 좋다.
왜냐면 일을 하면서도 사람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인간적이다'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지만,
정작 공적인 일을 처리하는 데는 결격일 수 밖에 없다.
원칙도 지키면서 사람들의 형편도 배려할 수는 없는 것일까?
인정을 따르는 것도 나름 원칙은 있는 거다. '사람'이라는 원칙이다.
그러니 사람에 따라 가변적인 것이 나조차도 종잡을 수가 없어 때로 힘겨울 때도 있다.
이것도 저것도 시원하지 못하다.
그런 면에서 모세의 온유함은 원칙과 인정을 적절하게 사용한 데서 오는 것 같다.
그러나 모세를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모세에게조차 그 일은 쉽지 않아 보인다는 것이다.
모세의 고뇌, 그것은 그 양쪽 가운데서 외줄타기의 긴장이 아니었을까?
나도 오늘 하루를 살아가며 어느 한 쪽으로 기울지 않고 중심을 잘 잡아야겠다.
 

위치 파악하기

출6장

16 레위의 아들들의 이름은 그들의 족보대로 이러하니 게르손과 고핫과 므라리요 레위의 나이는 백삼십칠 세였으며

18 고핫의 아들들은 아므람과 이스할과 헤브론과 웃시엘이요 고핫의 나이는 백삼십삼 세였으며

20 아므람은 그들의 아버지의 누이 요게벳을 아내로 맞이하였고 그는 아론과 모세를 낳았으며 아므람의 나이는 백삼십칠 세였으며

26 이스라엘 자손을 그들의 군대대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라 하신 여호와의 명령을 받은 자는 이 아론과 모세요


성경에는 이야기를 전개해 가는 가운데 종종 족보를 등장시킨다.

누가 누구를 낳고를 반복하는 것이 지루하고 따분한 부분이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족보가 나오면 그냥 넘어가고 싶어 한다(예, 마1).

그런데 성경을 쓴 사람들은 왜 족보를 중요한 자리에 놓고 있을까?

다른 곳에 있는 것은 그 때 이야기를 하고라도

출애굽기 6장에 나오는 짧은 족보는 무슨 의도, 의미일까?


5장까지 모세의 활동이 워밍업이었다면 6장을 지나면서 본격적인 행동에 들어간다고 볼 수 있다.

또 족보 앞부분에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하시려고 하는 일의 무게를 짐작케 할 만한 ‘하나님의 출사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하나님의 출사표 다음에 등장하는 족보는 그 의미가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거대한 프로젝트를 떠안고 진행시켜야 하는 사람이 모세인데,

그 모세라는 한 ‘사람’을 소개하는 대목이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해서 모세의 위치를 분명히 하려하시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족보를 사용해 자신을 더 부각시키려 한다.

자신의 혈통의 우월감을 표시하거나,

출세한 자신으로 인해 별 볼일 없는 집안이 일어날 수 있었다는 것을 과시하려는 의도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등장한 족보의 의도는 모세가 당면한, 그리고 그가 책임질 일의 크기로 모세를 보지 말 것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그가 바로 야곱의 열 두 아들 중 셋째 아들 레위의 후손이고,

그의 할아버지는 고핫이며, 아버지는 아므람이라는 것이다.

모세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초인적 존재가 아니라 바로 이스라엘 백성 중 한 명이라는 것,

그래서 그가 그 조상이 없이 존재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

그런 관계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는 뜻이다.

또한 모세 한 사람을 주목하려는 시도를 멈추고,

한 사람과 함께 동역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며,

출애굽기를 읽고 있는 독자들 역시 오해 하지 말기를 바라는 당부인 것이다.


위치...

자신의 위치를 아는 것은 너무도 중요한 지혜이다.

어떤 일을 맡게 되었을 때, 그 자리까지 자신이 오게 된 과정과

자신이 참여하게 된 일이 그 때까지 이어져 온 과정을 아는 것은 너무 중요하다.

어쩌면 모세는 자신에게 쏠리는 시선을 이와 같은 마음 자세로 지혜롭게 대처했던 것 같다.

모세라는 걸출한 한 인물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강한 의지가 결국 이 일을 이룰 것이라는 소망이 담겨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인해 모세는 무거운 짐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으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소신 있게 감당할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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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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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녁에 한국코치협회에서 월 초에 진행하는 코칭카페에 다녀왔다.
코칭이나, 코칭과 관련된 정보를 나누면서 코칭 스킬을 업 시킬 수 있도록 하는 자리다.
엑션 러닝이라는 것을 배웠고, 그 도구로 포스트잇을 사용한 브레인 라이팅을 경험하게 됐다.
교회에서 생활하다 보면 나 혼자 이야기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중요한 이유는 선생님들이나 아이들과 만나는 시간이 너무 짧은 데 있다.
그런데 브레인 라이팅을 사용하면 짧은 시간에 여러 사람의 의견을 수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 스스로 결론까지 도출해 낼 수 있도록 할 수 있다. 이런 점이 약간 흥분하게 했다.
이와 같은 창의적 방법들을 모르고 일방통행적 소통만을 해 온 것도 반성을 했고,
당장 이 번 주에 응용해서 한 번 해 보기로 했다.

어쩌면 출애굽기 이하를 통해 만나는 모세는 듣는 것을 잘 한 지도자인 것 같다.
그는 말 뿐만 아니라 마음도 잘 읽었다.
백성들의 아픈 마음을 넘어 하나님의 깊은 속내까지도 들여다 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몸을 더 낮추어 하나님께서 행하시도록 했고,
백성들의 부당한 원망과 분을 최선의 태도로 상대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선생님들의 마음, 아이들의 마음, 나아가 하나님의 마음을 잘 읽고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텐데...
어떻게? 잘!
 

절망에서 희망으로 

출5장

1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2 바로가 이르되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


이미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시면서 바로의 반응을 예견하셨다.

바로라는 세상 권력, 혹은 사악한 세력은

그들이 맞닥뜨리는 하나님의 뜻에 따른 가르침이나 교훈을 ‘거짓말’이라고

주장하면서 갖은 수단을 강구하여 저지하려 한다.

모세는 그 첫 저항에 봉착한 것이다.


그러나 오해해서는 안 된다.

요사이 교회가 사회를 향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것이

모세가 전하는 하나님의 뜻과 같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이단, 즉 정통에서 끝이 다른 집단을 부르는 말인데,

때때로 교회의 지도자들의 태도를 볼 때 이단이 먼 곳에 있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교리상의 다름을 떠나 그들이 취하는 말과 행동의 끝이 하나님의 그것과 너무도 다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실현한다는 그 일의 과정을 통해 결과적으로 자신의 잇속을 차리게 된다면,

자신이 힘을 얻고, 영향력을 증대해서 자기의 뜻을 이루려고 한다면 그것이 이단이 아닐까.

그래서 ‘교회 속 이단’이라는 말을 쓸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런 지도자들을 생각할 때 모세라는 지도자는 그들과 정 반대의 자리에 서 있다.


자신이 지도자의 자리에 서기를 한사코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든든한 백을 뒤에 두고도 끊임없이 고민하고 힘들어 한다.

혹 자신이 하나님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 누가 되지나 않을까 노심초사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로를 상대하는 일이 말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당장 백성들에게 가해지는 가혹한 노역을 보며 모세는 괴로울 수밖에 없었다.

과연 이 일을 계속해야 하는 것인지, 오히려 더 고통만 늘어나는 것은 아닌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주님의 이름으로 하는 일, 때로 그 일이 옳은 일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의 현실을 배제한 채 밀어붙이는 것은 폭력일 수 있다.

마치 그 요구를 따르는 것이 신앙적인 것이고,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은 불신앙인 양 몰아붙이지 말았으면 좋겠다.

모세의 태도가 그랬다.

이후에도 드러나지만, 모세는 하나님의 이끄심에 맞추어 백성들을 인도하기도 하지만,

백성들이 그 보조를 맞추지 못할 때는 백성들을 등지고 하나님께 그들을 살펴 달라는 호소를 한다.


그렇기에 백성들뿐만 아니라 모세에게 있어 출애굽기 5장의 공기는 답답하기 그지없다.

그럼에도 이제 희망을 보는 것은

이제까지는 바로가 상대한 것이 이스라엘 족속이었다면,

이제 비로소 바로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직접 상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 그 결말은 너무도 뻔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그 기간을 참아 기다릴 수 있느냐에 달렸을 뿐이다.

그래서 현 상황은 전혀 달라진 것이 없이 오히려 더 악화 일로에 있지만

변화의 기운이 느껴지는 가슴 벅찬 장면들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의 고역이 심각하게 가중되고 있지만 이것이 바닥임을,

더 내려가지 않고 올라갈 일만 남았다는 것을 안다면

절망의 신음을 더하는 것이 아닌 희망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순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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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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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40년은 시작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설득하시는, 그
에게 40년(물론 그 때는 40년이 될 줄은 몰랐지만)을 맡기시려고 하시는 긴박한 장면이 이어지고 있다.

성경의 몇 구절을 뽑고, 또 앞뒤의 이야기를 엮어서 생각을 정리하면서
불현듯 '무슨 의미가 있나?'하는 생각이 든다.
그냥 성경을 읽으면서 느끼면 되는 것을 어줍잖게 내 생각으로 정리는 하려 하는 것이 말이다.
더구나 써 놓고 읽어 보면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는 질문이 나올 법한
내가 정말 싫어하는 투의 글이 되어 있으니 더욱 그렇다.
'기발하다'라는 평가를 듣고 싶지만 그것도 웃기는 발상이고,

쯧쯧

그래도 한 걸을 한 걸음 나아가다 보면 뭔가 시야가 생길 것이라 여기며
잘 보이지 않는 저 만치로 생각의 뭉치들을 던져 본다.
언젠가 예기치 않을 때, 나에게 진실로 필요한 어느 때 문득 곁에 있음을 깨닫게 될지도 모르니까.

 

가능성의 하나님

출4:13-17

13 모세가 이르되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14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하여 이르시되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 그가 말 잘 하는 것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그의 마음에 기쁨이 있을 것이라

15 너는 그에게 말하고 그의 입에 할 말을 주라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너희들이 행할 일을 가르치리라

16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할 것이니 그는 네 입을 대신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

17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


모세는 자신을 히브리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왕자의 신분임에도 히브리인 동족을 돕기 위해 애굽 사람을 죽이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다.

우발적인 사건이었다고 하더라도 모세의 의식 속에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계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일이 자신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자 도망했고, 광야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살았다.

그가 확실히 아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은 혼자라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양을 치며 여생을 보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에게 하나님이 나타나 실로 상상할 수 없는 일을 맡기고 계시니

놀라고, 거절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거부의 주된 이유는 ‘나’에 집중되어 있었다.

나를 믿지 않을 것이다. 내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나는 말을 못한다.

이미 자신의 능력으로 뭔가를 해 보려했던 일이 실패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데다

지금은 자신이 자신 안에 의지할 어떤 부분도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람들의 자신에 대한 오해 중 하나는

자신을 자기가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정말 자기를 잘 알까?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잘 통제하며 최선의 선택을 하고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은 듯하다. 잘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크게 오해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조절하지도, 최선의 대안으로 나아가지도 못하는 것이 사람들이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가장 잘 아신다는 것까지 모른 척 하며,

내버려 두라고 큰 소리를 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만남의 시간만을 가질 수 있다면... No Problem!

하나님과 함께 할 때 다시 일어 설 수 있고, 나아 갈 수 있고, 말 할 수 있고,

인내 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가 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로 설득하신다.

그가 기대어 살아왔던 지팡이가 변하여 뱀이 되고,

지팡이를 잡았던 손에 문둥병이 발하고 고쳐지는 기적을 보여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곁에 계시다는 뜻이고, 함께 할 것이라는 강한 메시지였다.

그럼에도 패배주의에 빠져 저항하는 모세는 하나님께서 화를 내시면서 까지 강권하실 때 비로소 일어선다.

40년 전에는 자신이 뭔가를 해 보려고 했었다면, 이제는 철저히 자신 없음을 경험하고 난 후

자신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존재의 힘으로 일어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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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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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가 가득한 날, 햇살이 방안으로 가득히 들어온다.
새벽기도회를 가려고 했으나 4시에 순간 눈을 떴다가 시간만 확인하고 자는 바람에 9시가 넘어서 일어났다.
그래도 선생님들과 문자를 주고받기로한 약속 덕분에 날라온 문자가 나를 맞아 주었다.
'하나님은 예배의 전통이 아닌 열정과 헌신으로 감동받으신다' p87 황사 조심하세용^^
나의 답은 '예수님과 사랑에 빠지는 것, 이것이 진정한 예배다' p89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시길 황사가 아닌
ㅎㅎ

너무 잘 알고 있는 이야기에서는 그 안에서 새로운 메시지를 찾아 내는 것이 더 어려운 것 같다.
그냥 나름대로의 생각을 적어 본다. 부족하지만 ㅋㅋ
 

과정의 하나님

출3:2-4

2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3 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니 그 때에

4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울부짖음을 들으시면서도 80년이나 모세를 기다리셨다.

애굽 왕궁에서 40년,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아마도 모세는 이제 자신의 때, 자신이 뭔가 할 수 있는 시기는 지났다고 생각할 충분한 시간이 찼을 때였다.

그는 그저 양을 치는 목동으로 삶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은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에게 오래 전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던 일들을 함께 하자고 말씀하신다.


어찌 생각하면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다.

이제 다 늙어서 힘도 없는 사람을 찾아오셔서 무언가를 하자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말이다.

하나님은 늘 이런 식으로 일하시는가?

연약한 여인들인 두 명의 히브리 산파들을 통해서 일하시는 것도 그렇고,

가족에게 버림받고 타국에서 홀로 생고생을 하는 요셉을 통해 일하시는 것도 그렇고.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이며, 가장 탁월한 점일 수도 있다.

어쩌면 가장 어려운 길을 택하시는 것이고, 결국 가장 뛰어난 결과로 이끌어 가신다.

누구도 감히 상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일하시는 하나님만의 독특한 방법!


사실 하나님은 당신이 보여 주실 수 있는 그 어떤 기막힌 기적들 보다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만들어 가시는 과정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모세 한 사람이 하나님을 바로 알고 온전해 지는 것이

뭔가 기적들을 보며 홀린 듯이 하나님을 좇는 것 보다 더 선호하신다는 것이다.

때로 힘겹고, 고통스러울지라도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따를 수 있는

한 사람의 존재를 더 귀하고 소중하게 보신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더디지만 이 길을 선택하시고,

오늘도 모세와 잘 통하지 않는 대화를 시도하고 계신다.

아무튼 하나님은 이 대화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가실 것이다.

모세 또한 불붙은 가시떨기라는 놀라운 광경에 이끌리기는 했으나,

결국 진솔한 하나님과 직면하면서 이제까지 가져왔던 자신의 그릇된 하나님 이해를 수정해 간다.


만약 이런 과정을 생략하고 강압적으로 하나님의 뜻이니 따르라는 식으로 이끌었다면

이후 40년의 광야 생활동안 모세가 백성들의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한 공격들을 참고 이겨낼 수 있었을까.

하나님은 먼저 무엇을 해야 하는 지 분명하게 아셨고,

그렇기에 하나님과 어울리지도 않고, 어리석게까지 보이는 과정을 기꺼이 치르고 계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정을 생략한다.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그들의 마음을 홀려서 단기간에 현격한 결과를 얻고 싶어 한다.

너무 성급하고, 너무 가볍고, 너무 얕은 수를 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크신 하나님, 능력이 충만한 하나님께서 모세를 설득하는 장면은 그런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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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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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자료로 예전에 교사 경건회 때 나름대로 써 둔 것이 있다.
원래 자기가 쓴 글을 좀 다시 보면 어설프기 짝이 없기 때문에 이리저리 수정을 할 수 밖에 없는데
그러다 보니 오히려 새로 쓰는 것보다 시간이 더 걸린다.
하지만 나름 정리를 할 수 있어 재미있다.
단점은 간략했던 것에 자꾸 말을 붙이는 바람에 길어진다는 거다.
 

출2:24,25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하나님은 천년을 하루같이 여기시기도 하지만 하루를 천년같이 여기실 수 있는 분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스러운 백여 년의 기간은 아무 것도 아닐 수도 있지만,

반대로 그들의 고통과 슬픔을 고스란히 당신의 것으로 가져가실 수 있는 분이라는 뜻도 된다.

요셉이 죽고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이 애굽을 다스릴 때

아마도 그들은 보호자를 잃은 상실감을 맞봐야 했을 것이다.

이스라엘 족속들은 조상으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속의 하나님은 알고 있었으나

제대로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하는 방법을 알지는 못했다.

그러니까 양적으로는 충분히 늘어났지만 질적으로는 아직 부족한 상태였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고 있는 현실을 본다면 이 위기를 타개하는 것은 아주 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상황을 모두 다 알고 있으셨음에도

마치 아무 것도 모르시는 것처럼 또다시 수십 년을 더 보내시는 것을 보게 된다.

누가 봐도 곧바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서 그들을 구해 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잠자코 계신다. 한 사람이 준비될 때까지.

그 한 사람, 하나님의 대안은 모세였고, 큰 인내심으로 그를 기다리신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움직이시기 위해서는 한 사람이 필요하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계획하신 일들을 실현해 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은 사람이 없으면 일하실 수 없는 분이다.

그래서 감히 하나님을 ‘무능한 전능자’라고 부른다.

사람이 준비되지 않으면 하염없이 무능할 수밖에 없는 분, 하나님.

그 곳에서 그 분은 손이 없고 발이 없고 입이 없다.

오늘 전능하신 하나님을 유능하게도 무능하게 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나다.


재미있는 것은 모세는 바로의 딸에게 구함을 받아 이름도 얻고 40년의 삶을 보장 받았다.

그리고 미디안 제사장의 딸에 의해 구함을 받아 또 40년의 삶을 보장 받았다.

이런 우여곡절의 시기를 거치며 모세가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 준비되고 있을 때

드디어 하나님은 그들의 고통을 들었고, 언약을 기억하고 있으며, 돌보실 것이라는 뜻을 드러내신다.

이제 모세의 나머지 40년의 삶을 하나님께서 보장해 주시려 하신다.

그러나 그 이전과 다르게 모세는 강한 의지로 저항하는 모습이 다음 장에서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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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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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교회에서 '목적이 이끄는 40일' 캠페인을 하고 있다.
새벽기도회에 대한 막대한 부담을 갖고 있으면서도 벌써 두번이나 빠졌다.
그래도 전 교인이 책도 같이 읽고, 말씀도 같이 듣고, 소그룹으로 모일 수 있어 나름 유익한 기간이 될 것 같다.

40일... 나는 그것을 좀 패러디 해서 나름대로 출애굽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내가 한다고 하지만 뭐 다 주워 들은 이야기들을 나열하는 것이겠지만.
그래도 정리하는 차원에서 도움이 될 듯하여 시작해 본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해서 광야 40년을 생활 한 후 요단강 앞에 갈 때까지.

오늘은 그 첫번째, 출애굽기 1장의 이야기다.

출1:17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린지라



출애굽 이야기는 출애굽기로부터 시작된다.

애굽으로 내려온 야곱의 후손들이 어떻게 성장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면서

출애굽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 이유는 애굽이라는 나라에 이스라엘의 후손이 더이상 머물수 없게 된 것이다.

애굽 사람들, 특히 왕이 봤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너무도 위협적인 세력으로 성장해 있었다.

이를 두고 보지 못하고 고역을 시키고 결국에는 새로 태어나는 남자 아이들을 죽이라는 명령까지 내리기에 이른다.
그런데 이 때 이런 애굽 왕 바로의 서슬퍼런 칼날을 막아선 이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하나님이 보낸 천사도, 혹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나, 지하 조직의 힘센 장수도 아닌 두 명의 여인이었다.



십브라와 부아

그래서 출애굽의 이야기의 진정한 시작은 바로 이 두 여인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들이 우리들에게 던지는 교훈을 깊이 새기는 것이 그들에 대한 최선의 예의가 되리라.


살아가다 보면 상황에 따라서 어떤 행동을 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런데 ‘상황에 따라’가 문제다.

이제까지 가지고 왔던 삶의 원칙을 어겨가면서 까지 따라야 하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먹고 살아야 하는 입장에서 윗사람이 시키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힘이 없는 입장에서 힘 센 사람이 시키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여럿이 함께 하는 일인데 나만 빠질 수 없어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때 우리들을 심각하게 고민을 하지만 선뜻 나의 원칙에 따라 행동하지 못하고

누군가가 원하는 행동을 하고 마는 것이 대부분의 우리들이다.


그러나 애굽 왕의 명령을 받은 히브리 산파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원칙을 따라 올곧게 행동하고 있다.

아무리 애굽 왕 바로의 공권력이 가공할 위세로 자신들에게 명령한다고 해도

그들은 그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따르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실로 감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고 하면서도 우리들은 너무도 손쉽게, 이제는 어떤 고민도 없이,

세상적 흐름에 나를 실어 보내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겨우 주일에 교회에 와서 종교적인 행동을 하는 것으로만 위안 삼을 뿐이다.

그런 일들은 우리의 목숨을 요구하지도 않는데...


이런 산파들의 목숨을 건 행위로 인해 아론이 목숨을 부지 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산파들을 잇는 이들은 아므람과 요게벳, 미리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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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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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이 아쉽다.

말씀새김 2007. 2. 16. 09:53

사무엘상 15장의 이야기는 사울의 인생에 결정적 사건을 담고 있다.
하나님께서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명령하셨는데 사울은 충실히 이행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일련의 사울의 일탈을 경험하시면서 그를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신다.
이 마음을 전해 받은 사무엘 역시 근심하고 부르짖었다고 나온다.
결국 하나님은 사울에 대한 마음을 접고, 새로운 왕을 세우실 것을 결정하고 다음 장에서는 다윗에게 기름을 붓는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사울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처분이 가혹하기 이를 데 없다.
사울을 백성들이 고른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직접 고르신 것이다.
마치 백성들이 사울을 뽑아서 세워달라고 했던 것처럼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아무튼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세우신 왕을 너무도 쉽게 끝내 버리신다는 것이다.
몇 가지 실수를 했다고 해서 무참히 그의 왕조까지 닫아 버릴 것을 결정해 버리셨다.
그 전까지 보이셨던 하나님의 인내심이 너무도 얇아진 것 같아 보이기까지 한다.
사울이 아니면 요나단이 있지 않았나?
어떤 측면으로는 다윗만큼, 아니 그 이상의 인품과 재능을 가진 요나단까지 물리치실 필요가 있으셨을까?

그래서 사무엘상에서 만나는 사울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는 하나님의 본심이 아닐 것이라 생각된다.
어찌되었든 첫 번째 왕이었던 사울의 세력을 누르고 왕위에 오른 다윗이 그의 왕권의 정당성을 사울에 대한 하나님의 포기에서 찾으려 했다는 것이다.
사울이 죽고, 새로이 다윗의 왕조가 세워지고, 또 그 후손들이 왕위를 이어 갈 때
사울을 그 정도로 폄하하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래서일까? 사무엘상 끝 부분에 가면 하나님을 찾아 보려는 사울의 시도들을 가차없이 거절당하는 모습을 본다.
사울을 더이상 회생 불가한 멸망으로 몰아가려 하는 저자의 의도가 엿보이는 부분이다.

성경에서 사울만큼 불운한 인물이 또 있을까?
사실 진위를 떠나서 그에 대한 왜곡된 기술들이 그를 더 초라하게 한다.
그의 뒷모습이 애처롭다.
그를 오해할 수 밖에 없는 분위기가 또 아쉬움을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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