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인류학 수업 시간에 ‘30살이 더 많은 사람으로 저 사람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분’을 찾아서 심층인터뷰를 해 오는 것이 어떻겠냐고 교수님이 과제를 내 주셨다. 하지만 수강생 대부분 주변에 그런 사람이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교수님은 그러면 ‘자신이 30년 후에 누군가에게 그런 생각을 하게끔 하는 사람이 될 수는 있을까’를 질문하셨다. 30년 후에 누군가 나를 본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을까? 지금 내 모습을 보면 없을 것 같지만, 혹시 가능하다면 오늘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수업을 마치고 11시를 넘기는 시간까지 모여 앉아서 두 주 남은 행사 이야기와 또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대학원 동기들을 보면서 참 좋은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거의 중간이니까 나를 중심으로 아래위로 10살이 훌쩍 넘으니 최고 20년도 더 차이나는 사이도 있다. 그런 연령 차이에다가 알게 된지 8개월 여 되는데도 얼마나 오누이 같고, 남매 같고 형제자매 같은지. 어쩌면 이렇게 만나기 위해 지금까지 달려온 사람들처럼 말이다.

9월 19일 화요일
오늘 나는 우리 삶이 수많은 형태로 연결되어 왔다는 점에 새삼 놀랐다.
                                                                                                  (헨리 나우웬의 마지막 일기 50p)

헨리 나우웬을 만났던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 아닐까? '저 사람처럼 살고 싶다'고. 만약 헨리 나우웬 신부를 알게 되었고, 관계를 맺게 되었다면 그 관계를 지속하고 싶은 생각이 저절로 들지 않았을까? 뭐 그 사정도 잘 모르고, 인간 헨리 나우웬에 대해서도 자세히 모른다. 단지 그의 저작들을 통해 그의 생각을 엿보았을 뿐이다. 글이라는 것이 묘해서 그 사람을 다 보여주는 것 같으면서 교묘하게 진면목은 감출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어쨌든 헨리 나우웬이 관계를 지속하면서 그들과의 연결에 새삼 놀라는 대목에서 나는 뭘 그걸 가지고 그러나 하면서도 나에겐 그런 관계가 있는 지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오늘 낮에는 친구가 목사 안수를 받는 곳에 다녀왔다. 내가 동기회에 회장 없는 총무라서 대표 격으로라도 가야했고, 또 평소 통화를 자주하고 지내는 편이었기에 당연히 가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고민없이 다녀왔다. 하지만 거기까지이다. 그 관계가 나에게 감동을 주는 것도 아니고, 새삼스럽게 놀랄만하지도 않다. 19년 지속된 관계지만.

오늘 만나는 사람들, 과연 그들과의 연결이 얼마나 갈 수 있을까? 삶을 정리하는 순간까지 나의 존재를 느끼게 해 줄 사람이 있을까?

나와 30년 차이나는 이들은 지금 초등학교 1학년들이다. 그들과 진솔한 만남을 가지려하면 최소한 10년 이상은 있어야 할 것 같고, 그 전에 20년, 아니 10년 차이라도 마음을 나누며 공존의 기쁨을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 한두 가지라도 서로에게서 담고 싶은 점들을 찾아 갈 수 있으면 더 좋겠고. 그래서 오늘 목사 안수를 받은 친구도, 또 같이 공부하는 동기들도, 교회에서 만나는 모든 이들도 귀하고 소중하게 만나고 연결해 가야겠다. 언젠가 그들과 연결되어 있음에 새삼 깜짝 놀라기를 바라며.

92년에 한 동기의 결혼식을 마치고 참석했던 친구들이 사진을 찍었다.
뒷줄 왼쪽에서 네 번째, 여섯 번째 친구가 오늘 안수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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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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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은 사랑이다.
레19장
2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사람은 하나님이라는 한 몸에서 태어난 존재들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란 분리됨의 결과물 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각자 다른 모양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자신들의 본래적 정체성을 망각했기에 하나님께서로부터 멀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속적으로 강조하시는 거룩, 특히 레위기를 통해 보여주시는 거룩의 모델은
바로 이와 같은 분리되고 어그러진 관계를 회복시키시려는 과정으로 보입니다.

그것이 부모이든, 가난한 이웃이든, 일꾼이든, 종이든
거꾸로 재판관이든, 부자들이든 간에
서로를 향해 형제라고 말할 수 있게 됨으로
그래서 한 부모 아래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는 존재임을 각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형제로서 산다는 것은 단지 모든 것을 허용하는 관계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하시듯이 바른 원칙을 갖고 그 쪽으로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 전재됩니다.
왜냐면 천지창조에서 보여주셨듯이 하나님은 혼돈의 하나님이 아니라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질서는 단지 사람과의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짐승에서 식물에까지도 적용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고자하는, 하나님의 백성 됨을 깨닫는 사람은
사람과 일, 사물을 보면서 사람의 기준과 원칙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과 원칙, 즉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좇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이미 그 모든 것에 하나님께서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보지만 하나님을 보고, 짐승을 보면서도 역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마치 야곱이 형 에서의 얼굴을 보며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 같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 하듯 한다는 것이 바로 거룩한 삶이 아닐까요.

만물에 깃든 하나님, 그 생명을 알아 볼 수 있는 눈을 키우고,
그 모든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 아끼는 마음을 가지는 것
그로부터 하나님의 마음과 만남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관계를 나누고 차별하다 못해 멸시하고, 적대하다 못해 학대하며, 책임전가하는 것이 아닌
모두 하나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됨 안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 마음은 결국 당신을 모함하고, 때리고, 채찍질 하고, 십자가에 못박기까지 한 사람들을
용서하며 품으신 예수님의 모습에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삶을 거룩한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그 안에 하나님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한 형제로 볼 뿐만 아니라
바로 자신으로 느끼고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겐 너와 내가 따로 없고, 그 누구도 하나님과 따로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으셨습니다.
그 분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를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땅에 살지만 하늘을 만날 수 있는 삶,
마음 열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곁에 있는 이들을 사랑하는 삶.
이것이 거룩한 삶입니다.

추가>
그래서 사람이 사람을 만난 때, 내 안에 하나님과 상대방 안의 하나님이 만나는 것.
그러므로 결국 내가 나를 만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희로애락이 나의 것이 된다.
같이 느끼는 세상, 거룩한 공동체를 이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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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질서_또 하나의 약자 보호
레18장
24 너희는 이 모든 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들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더러워졌고 25 그 땅도 더러워졌으므로 내가 이 악으로 말미암아 벌하고 그 땅도 스스로 그 주민을 토하여 내느니라

땅을 더럽히는 일-근친상간
어머니(아버지의 다른 아내), 누이, 손녀, 외손녀, 고모, 이모, 숙모, 며느리, 형제의 아내, 아내의 자매
여인과 그 여인의 딸 혹은 손녀나 외손녀 함께 취함 불가, 자녀를 몰렉에게 주는 일, 남자가 남자와, 짐승과 교접

예전에 어떤 집에서 개를 키웠다고 합니다.
암컷이 새끼를 낳았고, 수컷인 새끼가 자랐는데
어느날 주인은 애미와 새끼가 교미를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너무도 놀란 이 아저씨는 몽둥이를 들고 둘 다 죽여 버리겠다고 달려들었다고 합니다.
그 때 아주머니가 아저씨의 팔뚝을 잡고 말리며 '그러니까 짐승이죠!'라고 했다고 합니다.
물론 개를 길러 보면 아무리 커도 최소한 지 새끼는 알아보는 것 같은데,
아마 그 어린 수놈이 정신 줄을 놓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무튼 짐승과 사람의 다른 점은 짐승은 온전히 본능적으로 산다는 것이고,
사람은 본능이 있지만 이성적으로 조절하며 살 수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자기 몸뚱이가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질서를 알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만일 사람들이 짐승처럼 사는 일이 만연하게 된다면 그것은 몸과 마음이 더럽혀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만 더럽혀진 것이 아니라 땅까지도 더럽혀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주시며 지금은 더렵혀진 가나안의 사람들을 쫓아내시지만
강조점은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고, 그래서 사전에 경종을 울리시는 것입니다.

좀 다른 측면으로 보면 성적 문란의 최대 피해자는 여성일 수밖에 없습니다.
또 힘이 약한 남자들은 그가 일가친척이라도 그에게서 자신의 아내를 지킬 수 없게 됩니다.
그렇게 작은 자들의 슬픔과 한이 쌓이는 사회는 오래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땅이 스스로 그 주민을 토해 낸다는 말씀은 너무도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약자를 보호하는 문제는 전체 사회를 지키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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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운 거룩
레13장
2 만일 사람이 그의 피부에 무엇이 돋거나 뾰루지가 나거나 색점이 생겨서 그의 피부에 나병 같은 것이 생기거든 그를 곧 제사장 아론에게나 그의 아들 중 한 제사장에게로 데리고 갈 것이요

제사장의 중요한 업무 하나는 백성들의 피부를 관찰하는 것입니다.
혹시 무엇이 돋거나, 뾰루지가 나거나 색점이 생겼을 때는 지체 없이 제사장에게 가서 그 곳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제사장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절차에 따라서 꼼꼼하게 관찰하고 그것이 정한지 부정한지를 판가름내 주어야 합니다.
절차에 따라 꼼꼼하게 관찰한다는 것은 환처가 어디이든 그가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 거의 만지다시피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만약 제사장이 자신을 '난 거룩한 제사장인데, 이런 더러운 일을 할 수 있겠어!'라는 생각으로 이런 일들을 기피한다면 아마 전염병으로 변해 백성들에게 큰 재앙을 맞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제사장의 일은 단지 한 사람의 피부병을 살피는 것이 아닌 전체 백성의 생명을 돌보는 일입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앞에서도 말씀을 드린 것처럼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드러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사장의 거룩한 직임은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시는 곳에서 그 일을 하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사랑하셔서 물이 없어 잘 씻지 못해 발생하는 피부병들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큰 재앙으로 죽을 수도 있는 것을 면하게 하시겠다는 깊은 배려하심이 머무는 곳이 바로 거룩한 곳입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의 거룩한 일은 바로 질병으로 더러워진 살갗을 살피고 만지는 일인 것입니다.
제사장의 일이 성전에서 멋들어진 제사를 집례하기만 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요사이 목회자들의 다수는 여전히 열악한 삶을 살고 있지만(이 표현에 반감을 가질 수도 있지만)
눈에 띄는 몇몇 교회의 목회자들이 끝없는 영광과 힘을 좇는 모습을 봅니다.
물론 과거 그들의 삶은 쉽지 않았다는 것을 알지만, 그것으로 정당화 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거룩하다고 말하는 사람으로서 한 쪽으로 너무도 멀리 가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더 안타까운 것은 많은 젊은 목회자들이 그런 소위 출세한 목회자들의 모습을 선망한다는 것입니다.
너무도 빨리 그쪽으로 길을 정하고 그 노하우를 전수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길은 하나님이 열어 두신 길이 아님을, 거룩한 사역의 길이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오늘 아파하는 한 사람을 찾아 그가 온전해 질 길이 어디에 있을 지 함께 고민하는 모습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더러운 구유에 오시고, 먼지 날리는 길을 걸으시며, 냄새 나는 옷을 걸치셨지만
그 분이 하신 일들, 만난 사람들, 가신 길로 인해 거룩한 분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목회자들만 탓할 일도 아닙니다.
성도들은 말씀 좋은 교회를 찾아 다니며 자신의 필요에 따라서만 '나홀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곪아 터진 부분이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 분의 은총 안에서 산다는 것은 단지 홀로 가능한 일이 아닌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서로 돕고 힘을 주는 관계의 형성이 이루어질 때 하나님은 그 안에서 거룩함으로 역사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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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이 무슨 뜻인지 아세요?
레11장
44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길짐승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4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육지의 모든 생물 중 먹을 만한 생물 -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
먹지 못할 생물 - 두 가지 조건 중 하나만 충족하는 집승(낙타, 사반, 토끼, 돼지)
물에 있는 것 -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것
새 중 가증히 여길 것 - 독수리, 솔개 물수리, 말똥가리, 말똥가리 종류, 까마귀 종류, 타조, 타흐마스, 갈매기,
                                새매, 올빼미, 가마우지, 부엉이, 흰 올빼미, 사다새, 너새, 황새, 백로, 오디새, 박쥐
혐오할 곤충 -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어나는 것
먹을 수 있는 곤충 - 앞의 조건에 뛰는 다리가 있는 것(메뚜기 종류, 베짱이 종류, 뀌뚜라미 종류, 팥중이 종류)


이쯤에서 거룩이라는 말을 정의해야 할 것 같습니다.
거룩의 정의를 하기 전에 제 경험담 하나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시절에 열심이 특심이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친구와 금요 철야기도회를 여의도순복음교회로 다녔습니다. 학기 중에는 가끔 가고, 방학 때는 거의 매 주 갔던 것 같습니다. 다 아시겠지만 순복음교회의 특징은 뜨거운 기도에 있습니다. 2,3시간여의 1부 예배가 거의 12시까지 진행되는데 마칠 즈음 뜨거운 통성기도를 합니다. 그것이 마치는 쉬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쉬는 순서가 있었다기 보다는 그 때가 쉬기에 적당해서 늘 밖에 나와서 어묵 같은 것을 사 먹고 들어갔습니다. 어느날 쉬는 시간에 나가려고 하는데, 옆에 앉아 있던 아주머니께서 아무래도 순복음교인 같지 않다는 생각을 하셨는지 '어디서 왔냐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장로교회에서 왔다고 했더니, '아하~ 그 거룩 거룩 하는 데요!' 하는 겁니다. 물론 평소 장로교인들의 모습을 거룩거룩한다고 표현하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렇게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듣는 것은 좀 당혹감이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순간 제 입에서 나온 말은 ' 거룩이 무슨 뜻인지 아세요?'였고, 그 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출출한 배를 채우고 들어와서는 좀 미안한 마음에 좀 전에는 죄송했다고 사과를 했고, 아마 그 아주머니도 겸연적어 하시며 미안하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다른 교회에까지 가서 철야집회에 참석할 정도의 청소년을 너무 과소평가 했던 거죠.

아무튼 그 당시 저는 거룩에 대한 분명한 뜻을 알고 있다고 자부했었습니다.
그 뜻은 '죄와 분리된 상태'였습니다.
그러면 레위기 11장에서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는 짐승들을 말씀하시며 요청하시는 거룩의 뜻이
제가 어린 시절 배워 알고 있었던 그것과 같은 것일까요?
거룩의 뜻을 사전적으로 찾을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께서 이 거룩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사용하셨는지를 살펴보는 것으로도 그 뜻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 것이 더 정확한 뜻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 2:3)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5)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태에서 처음 난 모든 것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출 13:2)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출 20:8)

안식일을 명하시며, 모세를 만나 신을 벗으라고 하시며, 유월절을 재정하시며, 또 위에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성막과 제사장과 관련하여 반복해서 거룩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거룩이라는 단어는 사람과 사람 간에서 나온 말이 아닌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어서 나온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사람 쪽보다는 하나님 쪽에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거룩은 단지 깨끗하다 더럽다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셨을 때 깨끗할 장소가 어디며, 깨끗할 사람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거룩은 더럽고 추한 것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기억하는 장소와 사람에게 주어지는 칭호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백성이라는 것은 수평적인 비교를 통해 어떤 특별함이 아닌 것입니다.
안식일이라는 한 날이 거룩한 것이 아니라 그 날을 하나님의 이름을 기념하기에 거룩한 것이고,
모세가 선 땅이 거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곳에 계셨기 때문에 거룩한 것이고,
처음 난 것이 거룩한 것이 아니고 그것이 하나님께 바쳐지기 때문에 거룩한 것입니다.
그러니 반대로 부정하다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부정한 어떤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재의 상태가 부정한 것입니다.

부정한 동물과 정한 동물을 이야기 할 때
깊이 들어가면 그것의 생물학적 이유들을 뒷받침해서 논의를 진행할 수도 있겠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는 것들을 먹는 것이 건강에 좋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기도 합니다.
뭐 그럴 수도 있고 안 그럴 수도 있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이 하나님과 만나는 것을 전제로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의복을 입을 때 거룩한 옷을 입은 거룩한 제사장이 되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의 삶을 전제로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식생활에 대한 규례들을 받을 때 그 음식은 거룩해 지고 백성들은 거룩한 백성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 짐승이 어떠한 것은 상관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조금 복잡해 지기는 했지만 무슨 말을 하려는 지는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어떤 것은 거룩하고, 어떤 것은 정하다 혹은
어떤 사람은 죄인이고, 어떤 사람은 의인이다 라는 식의 이분법적인 사고를 지양하지는 얘기입니다.
예를들어 주초의 문제만 놓고 봐도 어떤 교회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고 또 어떤 교회에서는 정죄가 됩니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을 붙들고 이러쿵 저러쿵 에너지를 소비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중요한 것은 레위기 11장에 나오는 정한 동물과 부정한 동물이 어떤 것이냐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의 자세를 잡아가는, 그래서 하나님과 소통하는 사이가 되어
결국 하나님께서 '거룩하다'라고 인정하는 백성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존재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단절된 채로
자신의 어떤 것을 통해 거룩함에 이르려고 합니다.
나름대로 외형을 꾸미고, 자기식의 신앙생활의 틀을 갖추어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전혀 상관이 없음으로 아무리 최고의 길을 가더라도 격하게 표현해 부정한 상태하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안에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가 있고,
그 만남을 전제로 한 준비의 과정이 있다면 지금 아무리 형편없는 상태라 해도 거룩한 그리스도인이라 하겠습니다.

좀 더 생각해 보면 교회라 할지라도 하나님과의 만남의 자리가 될 수 없다면 거룩한 곳이 아니며
공터 한 모퉁이 볼품없는 곳에 천막을 친 곳이어도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곳이라면 거룩한 곳이 되는 것입니다.
마치 소냐 돼지냐를 가르듯 눈에 보이는 모습만으로 정·부정을 가르라고 이 말씀을 주신 것이 아님을 오늘은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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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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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이끄는 40년을 시작한지도 꽤 되었다.
교회에서 '목적이 있는 40일' 캠패인 중 2월 마지막 날에 시작을 했는데
벌써 6월 하순이 다 되었다.
원래 목적지는 신명기까지 하는 것이었는데,
40장 보는데 넉 달이 걸렸으니, 갈 길이 너무 멀다.
레위기라는 산은 또 어떻게 넘을 수 있을지...
그래도 레위기까지는 가보고 싶다는 마음이 있는데, 27장이니.
암튼 허접한 내용이었지만 여기까지 온 것에 감사하고, 또 마음을 잡아서 레위기도 함 가보자.
천천히, 서둘지 말고.ㅋㅋ

 

마침이 아닌 시작

출 40

16 모세는 주님께서 그에게 명하신 것을 모두 그대로 하였다.

17 마침내 제 이 년 첫째 달 초하루에 성막을 세웠는데,


출애굽 한 지 둘째 해 첫째 달 초하루에 성막을 세우고 봉헌합니다.

모세와 백성들의 머릿속에 시내광야에서 보낸 지난 10개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을 것입니다.

부끄럽고 죄스러운 사건 사고의 연속, 그러나 뿌듯함과 감사의 마음이 가득한 시간이었습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모습을 갖추는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비록 광야에서 불완전한 삶을 살고 있는 형편이지만 중심에 하나님의 성소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더 이상 ‘없음’으로 인한 불안감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언제든 기댈 언덕이 저 멀리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닌 자신들 안에 있게 된 것이니까요.


그러나 성막이 세워진 것은 시작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들로서 본격적인 출발점에 서게 된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하드웨어가 만들어졌고, 그것을 채울 소프트웨어의 문제가 남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장면에서 멈추어 버리면 안 됩니다.

이 성막을 통해 해 나갈 일들이 어떤 것인지 더 관심 갖고 집중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 성막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능한 최대로 끌어 올릴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의 관계를 담는 그릇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릇의 완성 앞에서 만족하고 그릇만 쳐다보고 있으면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누군가 이 건물, 제도에 집착하면 정신, 관계, 생명력은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제도가 어느 정도 안전장치 역할을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시대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가변성, 수용성을 가지지 않는다면

변화와 발전의 발목을 잡는 걸림돌이 될 뿐입니다.

지금도 멋들어진 예배당 건물을 지어놓고는 그 건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기 보다는

그 건물 자체를 지키기 위해 급급하는 경우들을 봅니다.

본말이 전도되어도 한 참 나가버린 것이라 하겠습니다.

안식일이라는 제도가 그러했듯, 성막 역시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백성들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사건이 중요한 것이고,

결국 성막과 제도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로부터 이어지는 레위기의 말씀들이 의미가 있습니다.

성막과 제사장 제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들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얼마나 당신의 백성들을 사랑하시는 지도 알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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