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이끄시는 40년은 레위기에서 끝나지 않고 민수기로 이어진다.
실은 레위기까 끝나면서 그들의 광야 생활은 겨우 1년을 조금 넘긴 것 뿐이다.
그러니 앞으로 39년이 남았다고 보면 된다.
레위기에서만 멈춘다면 '하나님이 이끄는 1년'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최소한 민수기를 지나야 40년의 대부분을 거치는 거다.
다시 시작~

책임 나누기
민 1:2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회중 각 남자의 수를 그들의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라 그 명수대로 계수할지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이끄셔서 광야로 나왔고, 틀림없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이는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일들만으로도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실은 변함이 없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제는 가나안에 들어가는 날이 언제이냐의 문제만 남은 것입니다.
그런데 성막이 완성된 시점에서 하나님은 백성들을 계수하게 하십니다.

왜 백성들의 숫자를 세도록 하신 것일까요?
그냥 백성들의 숫자가 궁금하셨을까요?
혹은 이스라엘이 스스로 자신들을 방어하도록 하려 하신 것일까요?
아니면 백성들의 수로 힘을 과시하도록 하려 하신 것일까요?
뭐 그럴 수도 있겠으나 잘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광야 가운데서 백성들을 계수하게 하신 것은 
각 지파, 또 전체 이스라엘의 그 수에 걸맞는 책임을 감당하게 하시기 위함이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책임의 크기만큼 하나님과 동역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시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인구 계수와 다른 점입니다.
다윗은 인구 계수를 통해 이스라엘의 힘의 크기를 알고 싶었고, 또 그 세력을 과시하고 싶은 욕망도 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레위지파와 또 그에 속한 제사장들이 하나님 앞에 직임들을 맡아 갈 때
다른 지파의 백성들은 소외된 듯한 느낌을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들의 적당한 위치를 주시기위한 기초작업을 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시고 있고, 레위인들이 할 일을 받았듯
이제 이스라엘의 백성들 각자도 자신의 능력에 걸맞는 역할을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하나님과 함께 살기 위한 책임을 나누기를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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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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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지는 그리스도인

레4

3 만일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이 범죄하여 백성의 허물이 되었으면 그가 범한 죄로 말미암아 흠 없는 수송아지로 속죄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릴지니


속죄제(4:1-5:13)

속죄제에서 먼저 고려되는 것은 죄 지은 자가 누구냐였습니다.

범죄한 자가 누구냐에 따라서 제물이 되는 짐승과 제사 방식이 달라졌습니다.

특기할 만한 것은 제사장이 가장 먼저 언급되고 그 다음이 회중, 족장, 평민의 순으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사장의 자리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신 것이 분명한데,

이는 온 회중보다도 그 책임이 막중하다는 뜻이기도 하고, 또 제사장을 소중히 여기시며 관심 갖고 보신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제사장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권한, 혜택들을 누리며 함부로 행하지 못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한발 앞서서 하나님의 뜻을 더 반듯하게 실천할 책임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관심과 배려에 대한 정당한 응답이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그 제사장으로서 당신의 역할을 누구보다도 충실히 감당하셨습니다.

문제는 예수님의 그 제사장의 소임이 고스란히 오늘의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계승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나와 하나님 사이에 더 이상 중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을 변론하신다고는 하지만

이 땅에서의 삶에 대한 온전한 제사장의 직임은 누구도 아닌 나에게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 행동에 대한 책임이 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나의 제사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이 하나님의 시선 가장 가까이에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때로 어떤 목회자는 자신을 제사장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성도들은 또 목회자들이 제사장이고, 그래서 목회자의 기도는 특별한 힘이 있다고도 생각하기도 합니다.

물론 여러 사람들 앞에서 더 큰 책임을 맡았다는 것으로 특별한 자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앞의 생각은 예수님 이후 그리스도교를 근본적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책임질 수 없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고, 이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인의 삶이 곁길로 가도록한 것입니다.

자신들이 스스로 해결해 나갈 수 있는 일들을 다른 이(교역자)에게 돌리고 역시 무책임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인 모두는 레위기 4장의 맨 앞자리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가장 가까운 시선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부르셔서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대한 질문을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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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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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월요일에 똥을 펐다.
지난 6월 말에 펐으니 계산해보면 한 4개월에 한 번 정도는 퍼줘야 하는 것 같다.
똥을 푸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정말 똥을 푸는 일은 내키지 않는 일이다.
생각 같아서는 구덩이를 많이 파놓고 다 차면 덮어버리고 다음 구덩이를 채우는 식으로 살면 좋겠다.
해석에 해석을 거친 후에야 순환이라는 단어를 찾을 수 있지
막상 똥통을 보고 똥물 흘리며 옮겨다 뿌리는 일이 그리 호감 가는 일은 아니다.

그런데 생각을 좀 더 해보면 똥은 언젠가 나의 일부였던 놈이다.
그것이 몸 밖으로 나와서는 모여 있는 것이 이 것인데.
난 더럽다는 얘기만 줄줄이 퍼내고 있으니 똥이 조금은 섭섭할 것 같다.

내가 배설한 것을 내가 책임지고 처리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인데, 왜 싫을까.
도시 뿐만 아니라 시골조차도 이제는 정화조를 묻지 않으면 허가가 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곳에서도 똥을 직접 퍼내는 친구네 집과 우리집 그리고는 잘 모르겠다.

구분지어 놓고 그것을 모른척하고 살아가는 우리네의 삶.
누군가 다른 사람이 와서 돈을 받고 치워가는 형세.
생각 속에서조차 그런 불결다고 진저리를 치며 물을 내려 버리듯 지워 버린다.
마치 우리는 똥 같은 것과는 상관없는 것처럼 깨끗한 척한다.
정말 그래도 되는 것인가 싶다.

자기가 먹고 소화시켜 배설한 것을 스스로 책임지는 구조가 되었으면 좋겠다.
더럽다고 거리를 두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의미와 가치를 찾을 줄 알아야하지 않을지.

2005.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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