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처방
레24장
10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의 어머니가 이스라엘 여인이요 그의 아버지는 애굽 사람인 어떤 사람이 나가서 한 이스라엘 사람과 진영 중에서 싸우다가 11 그 이스라엘 여인의 아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며 저주하므로 무리가 끌고 모세에게로 가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슬르밋이요 단 지파 디브리의 딸이었더라 

레위기는 주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시는 제사와 제사장과 관련된 율법이 주를 이루기 때문에 사건은 거의 없습니다.
그 희소한 사건에 두드러지게 등장한 것이 두 번의 죽음의 사건입니다.
먼저는 하나님께서 직접 아론의 두 아들을 죽이신 것이고(10장),
두 번째는 레위기 24장에 등장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명하시고 사람들의 손에 죽는 사건입니다.
그의 죽음의 이유는 하나님(신성)모독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을 모독한 자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과
그의 출생 배경을 통해 광야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다른 피를 가진 이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어쩌면 그런 사람들이 중요한 고비마다 불만 세력으로 활동했을 수 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출애굽 관련 영화를 보면 다양한 종족들이 함께 나오는 것을 볼 수 있고,
그들을 중심으로 모세를 대항한 폭동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힘들 때마다 이들은 순수 이스라엘의 후손들보다 애굽을 더 추억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광야 40년이라는 형벌은 이런 불순한 동기들을 씻어내기 위해서도 필요한 과정이 아니었을까 추측하게 합니다.

아무튼 하나님을 모독한 것은 하나님의 귀에 들렸다는 것도 중요한 사실이지만
그 소리가 사람들의 귀에 들렸다는 것이 중요한 사실로 부각됩니다.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이름이 사람들의 입에 함부로 오르내리게 될 것이 뻔했습니다.
‘그래도 된다’는 생각이 팽배해 질 수 있고,
그렇다면 하나님의 존재와 상관없이 백성들의 의식 속에 하나님 상이 격하되는 것이고,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향한 자세 또한 흐트러질 것이 뻔합니다.

한 번 잘못할 것이니 그의 목숨을 가엽게 보고 용서해 줄 수도 있는 문제이지만,
이제 겨우 걸음마를 땐 이스라엘 공동체에겐 그런 일을 감당할 충분한 내공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가슴 아프지만 그를 돌로 쳐 죽이는 극약처방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를 가지고 하나님이 잔인한 신이니 뭐니 할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실수한 한 명의 인권도 소중히 여기시지만, 전체 백성들의 목숨을 살리시기 위한 선택을 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주의 그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모두 그의 머리에 안수를 할 때,
하나님 역시 슬픈 마음을 갖고 지켜보고 계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다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담지 않기를 바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후 이스라엘 역사는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사건들로 가득하게 됩니다.
공동체를 위해서가 아닌 한 개인을 위해 제사장을 임의로 세우거나
왕권을 유지하기 위한 들러리 정도로 여기는 경우도 많았으며
목석으로 하나님을 대신하게 하는 일까지 서슴지 않고 저질렀으니 말입니다.
그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때 더 두려워해야 합니다.
오히려 즉각적으로 하나님께서 화를 내시고, 대응하실 때 안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죄를 씻을 수 있은 방법을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버려 두실 때는 그 일들이 어떤 결과로 종지부를 찍게 될 지 긴장가운데 기다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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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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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한 아이가 두번이나 소리높여 우는 일이 있었다.
이 아이는 교회 올 때마다 공을 가지고 오는데,
오늘 결국 그것이 문제를 야기한 것이다.

한번은 선생님 한 분이 공을 빼앗아 캐비닛에 넣었다.
예배당에서는 공을 가지고 놀지 말라는 뜻에서 예배 끝나고 준다고 말이다.
그러나 이 아이는 아무리 그래도 공을 빼앗긴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큰 소리로 울고 불고 난리를 쳤다.
난 공을 내주지 않는 선생님의 단호한 외침까지 목격을 했다.

그리고 예배가 진행되고 있을 때, 설교 중이었는데, 또 폭발을 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는 모르지만 아까와 비슷한 상황이 연출되었던 것 같다.
이번에는 다른 선생님이 목소리를 높였고,
이 아이는 '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지 못하게 하느냐'고 울부짖었다.

그러나 난 그 상황에서 어떠한 행동도 하지 못했다.
그 아이 하나에게 묶여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선생님들이 지혜롭게 처리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기도 했고,
또 어떻게 해야 할지 자신이 없기도 했다.
겉으로는 신경 쓸 일도 많다는 듯 회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가족(반)모임이 진행 중일 때
이 아이가 뒷쪽에 공을 가기고 기대어 서 있는 거다.
다가가서 꼭 껴안으며 '전도사님은 네가 좋은데...'라는 말을 귀에 속삭여 주었다.
그런데 웬일로 이 아이가 예전처럼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지 않았다.
아이가 공을 가지고 복도로 나가길래 따라 나가서 몇 번 같이 차주었고,
다시 건물 밖으로 유도해서 둘만의 축구시합을 벌였다.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이 과정을 거치면서 어떻게 이 아이와의 관계를 형성해 가야 할지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아이와 놀아주고, 재미있게 놀아주고, 또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하고,
그리고 그 아이에게 살짝이 속삭이는 거다.
"우리 또 축구하고 놀자. 그런데 예배당에서, 예배시간에는 공을 차진 않았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아이와 신뢰를 쌓고 정말 하고 싶은 말을 한다면
아이에게 상처도 주지 않고, 아이도 좋고, 나도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미 어른이 된 이들은 그 정도로 마음의 여유를 갖고 있지 못하다.
그저 윽박지르고, 단시간에 복종시키려 할 뿐.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한 아이의 마음을 얻어 가는 과정이 교육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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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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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깨어살리/돌소리 2006. 10. 16. 19:46
사랑은 가만히 있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다.
가만히 있지 못한다는 것은 보고 또 보고
무엇인가 해 주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이리라.

작물도 동물도 또한 그러하다.
자주 가서 보고, 필요한 것들을 제때에 해주지 않으면 분명 무슨 일이 생기고 만다.

고추밭이 바로 집 옆에 있지만,
근래에 담 너머로만 흘깃 쳐다보고는 ‘괜찮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고추나무 사이로 들어가서 보니 풀도 많이 자랐고,
잦은 비에 커진 가지를 바로 세우지 못해 꺾여 있는 놈들도 많았다.
좀 더 일찍 줄도 더 매어주고, 풀도 매주어야 했던 것이다.
몇 개의 가지는 아예 부러져서 고추만 따서 바로 식탁으로 보냈지만,
다 먹기에는 너무 많은 것이 문제다.

토리(삽살개, ♂)에게도 비슷한 문제가 발생했다.
소리(풍산개, ♀)에 비해 벼룩이나 진드기가 더 많은 것도 아닌데,
아마도 비를 흠뻑 맞으면서도 나와서 짖어대서 그런지,
온 몸이 벌레 물린 흔적에, 쉴 새 없이 긁어 대는 바람에 상처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덕분에 털도 듬성듬성 빠져있었다.
어제까지 몰랐다.
근래에 더 심해진 탓도 있지만
밥만 가져다주고, 똥 치워주면서도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털갈이를 심하게 하는 구나 정도로 밖에는
그런데 정말 심각한 몰골을 보고서는 소름도 끼치고, 불쌍하기도 했다.
그래서 목욕을 시키고 몸에 약을 뿌려 주었는데
털이 검어서 벼룩도 잘 보이지 않고,
여전히 쉴 새 없이 긁어대니 나을까싶다.

보지 않으면 뭘 해줘야 하는지도 모르고, 그러기에 더 보려하지 않게 된다.
자주 보면 애정이 생기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

생각이나 말만이 아닌 사랑 담긴 행동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깊은 상처를 남기게 될 것이다.

2005. 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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