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어느 누구나 믿음을 갖고 살고 있다.

무엇이든 믿는 구석이 있기에 하루하루를 살아갈 힘을 얻는다.

그러나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서 삶의 내용은 확연히 달라진다.

지금 나는 무엇을 믿고 살고 있는가?

자신의 머리를 믿고 있나? 실력(능력)을 믿고 있나? 자신의 학벌과 인맥을 믿고 있나?

집안의 재력과 소유의 힘을 믿고 있나? 부모, 배우자나 자식을 믿고 있나?


사실 교회 밖을 예로 들 필요도 없이,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도 이런 질문에서 그리 자유롭지 못하다.

무엇을 믿고 살고 있냐고 하면, ‘예수’를 믿고 산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될까?

자신이 가진 소유와 자녀의 성취 같은 눈에 보이는 것들에 얼마나 휘둘리면서 살고 있나?

휘둘린다는 표현이 좀 거슬릴 수 있겠는데, 그것은 곧 오르락내리락 한다는 뜻이다.

성도들이 교회 왔을 때 표정이나 기도 내용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자신이 생각한 대로, 원하는 대로 되면 업 되고, 

자신이 생각한 대로,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다운 되지 않나?

자식을 보면서도 자기 눈앞에서 좋은 성적을 얻고 좋은 대학을 가야하고, 

좋은 직장을 가야 안심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그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이 무엇을 믿고 있는 지 알 수 있다.


오늘 예수님께서 선포하며 그의 사역을 시작하실 때 역시 마찬 가지였다.

사람들은 믿음이 있었다.

화려한 성전과 성곽이 자신들을 지켜주고 있다고,

자신들이 통달해 있는 율법의 조항들을 지키는 것이 자신들을 지켜줄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런 태도 가운데 정작 하나님께서 소외되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그러므로 ‘복음을 믿으라’라는 선언은

그렇게 왜곡된 믿음에서 참 믿음으로 돌아서라는 요청이다.

그래서 이제 예수님께서 그 믿음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성전을 중심하고, 예루살렘을 주목하고, 율법에 몰입하고,

더 나아가 자신의 부(성공)와 권력(정치적, 종교적)을 의지하는 삶에서 벗어나라는 선언이었다.


그러니 ‘복음을 믿으라’는 예수님의 선언은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동일한 파장으로 울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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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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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은 뭘 믿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삶을 살고 있느냐의 문제이다.
'어떤 삶을 사느냐'는 자신이 알고 있고 믿고 있는 것을 삶속에서 실천하는 것을 의미한다.
실천한다는 것은 회개(반성)와 동시에 변화된 삶으로 나아가는 결단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산다는 것은 믿음과 대응되는 반대개념이 아니라 믿음을 포함하는 더 넓은 의미이다.

누군가 무엇을 믿는다고 말할 때 그가 무엇을 믿는 지를 알 수 없다.
과장해서 표현하며 하나님 조차도 그가 무엇을 믿는 지 아실 수 없다.
오로지 그가 삶 가운데서 어떤 결단을 하고 변화된 삶을 살고 있느냐로 알 수 있을 뿐이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복잡한 질문들을 하는 이들을 보게 된다.
예정론, 신정론, 삼위일체는 물론 영지주의 등 난해한 문제들을 가지고 와서 해결해 달라고,
그것이 풀리지 않아서 신앙생활이 어렵다고 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헛다리 짚은 거다.

예수 그리스도의 단순한 삶을 배우고, 그렇게 하면 되는 것이다.
성육신이니, 동정녀 탄생이니, 대속이니 하는 것들도 중요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예수님의 사랑을 나도 실천하고, 예수님의 버림을 나도 실천하고,
예수님의 모욕당함을 나도 당하면 된다.
"하루에 한 시간씩 하나님을 만나고,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라는 마더 테레사의 말에 무엇이 더 필요하다는 말인가?

그리스도인은 어떤 이론이나 신학이 옳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나를 부르셨기에 그를 좇아 가는 사람들이다.
믿음을 넘어서 삶으로 작은 예수가 되는 것이 우리의 목표점이다.

하나님께서 묻지 않으실까?
"너 예수를 믿으며 살았냐?"가 아니라 "너 예수처럼 작은 자들을 사랑하며 살았냐?"라고.

믿음? 그건 의외로 간단하다.
우리의 구원의 문제가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거면 충분한다.
그리고 '믿습니다'라는 외침과 조건부의 행위로 결정할 수 있다는 오만을 버리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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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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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 교육 시간
레25장
20 만일 너희가 말하기를 우리가 만일 일곱째 해에 심지도 못하고 소출을 거두지도 못하면 우리가 무엇을 먹으리요 하겠으나 21 내가 명령하여 여섯째 해에 내 복을 너희에게 주어 그 소출이 삼 년 동안 쓰기에 족하게 하리라 22 너희가 여덟째 해에는 파종하려니와 묵은 소출을 먹을 것이며 아홉째 해에 그 땅의 소출이 들어오기까지 너희는 묵은 것을 먹으리라

이스라엘을 설명할 때 빼놓아서는 안 되는, 아니 가장 우선적으로 말해야 하는 것이 안식일입니다.
안식일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너무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그들의 삶의 순환이 안식일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나아가 인생의 순환까지도 안식일이 확장된 안식년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 한 명 한 명의 쉼의 문제에 관심이 있으셨듯이
땅의 쉼에도 역시 관심을 가지고 있으셨습니다.
땅의 쉼이란 결국 그 땅에 뿌리를 박고 생명활동을 이어가는 식물들에게까지 확장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뽑아내면서 그려 가시는 이상적 공동체 안에
단지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합니다.

땅의 쉼과 나무와 식물들의 쉼이 결국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저주받은 땅이 하나님의 복 주심에 의해 풍성한 소출을 내지만
그 땅이 한 없이 모든 것을 내 놓을 수 있는 무한한 창고는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땅의 생명력을 통해 무상으로 먹거리를 얻었으니
7년에 한 번 쉬도록 하여 재충전의 시간을 주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그러나 농사를 주업으로 하는 농부들에게 있어서 1년 농사를 짓지 않는다는 것은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농업이 아닌 목축업을 하는 민족이었기에 처음부터 길을 잘 들이면 되는 문제이긴 합니다.
그래도 막상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20절의 말씀을 미리 하시면서 걱정하지 말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 곧 믿음이 필요한 대목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확고한 믿음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을 나올 때 자신들의 가능성이나 소망을 보고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나왔듯이
장차 들어가게 될 가나안에서의 삶 역시 하나님에 대한 믿음 가운데 이루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땅의 안식은 6년 동안 일하여 먹고 살지만
단지 그들의 땀 흘림 만으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교육 시간이었습니다.
자신들이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먹을 것을 주신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면
땀 흘려 수고 하여 얻는 것에 대해서도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하지 못할 것입니다.
온전히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고백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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