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여기서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냈다는 능력에 관심을 갖는다.

그래서 예수님을 쫓으면서 그 능력을 자신도 행하고 싶다는 소망을 품는다.

마치 사마리아에서 베드로에게 능력을 돈으로 사고자했던 시몬처럼 말이다.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손끝에서 나온 능력이 아니다.

능력을 행하시는 ‘예수님’ 그 분의 존재이다.

그 예수님의 존재는 귀신의 말에서 드러난다.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귀신은 예수님이 누구인 줄 안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고 했다.

하나님의 아들, 엘리야 같은 선지자, 세상의 왕, 아론 이전부터 있었던 대제사장 등등으로 부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고 하는 다소 부족한듯해 보이는 표현으로 예수님을 불렀다.

그런데 여기서 ‘거룩’이 무슨 의미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거룩하다는 것은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완성이나 위생적으로 깨끗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거룩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누구보다도 하나님께 가까이 있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분이고, 하나님과 관계가 최고로 좋은 분이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한 점도 흠잡을 곳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암흑같이 꽉 막힌 상태로 존재하는 귀신은 예수님을 쳐다볼 수도 없는 것이다.

그 분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는 이름만큼 위대한 이름은 없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입에 올리지만,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뭐가 그리 많이 끼어있는 지.

되고 싶은 것, 얻고 싶은 것, 보여주고 싶은 것...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는 칭호는 요원하다.

신앙생활이란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있는 것들을 덜어내는 과정이다.

그럴 때 ‘하나님의 거룩한 자’에 조금이나마 가까워질 것이다. 

예수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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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지피는 사람들

레 6장

13 불은 끊임없이 재단 위에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라


성경말씀에 구체적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제사장들은 여러 분야로 서로 다른 일을 감당했을 것입니다.

모세가 이 말씀을 받아 전할 때에야 아론과 네 명의 아들이 제사장의 일을 했지만

이후에 후손들이 많아져 제사들이 많아졌을 때는 각각의 맡은 일들을 감당했겠죠.

잘 아시듯 다윗의 때에는 제사장들이 많아서 가족별로 반차를 나누어서 봉사하게도 했습니다.

제사장들이 맡은 일 중에서 가장 잘 해야 하는 부분이 불과 관련된 부분인 것 같습니다.

왜냐면 재단의 불은 절대로 꺼지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아궁이의 불을 꺼뜨리지 않으려는 과거 우리네 아낙네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면 조금은 이해가 될 것입니다. 

제사장은 혹시 재단의 불이 꺼지지 않을까 노심초사 하며,

불을 지필 장작들도 충분히 확보를 해 두어야 하고, 날씨의 변화도 예민하게 관찰을 해야 했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재단의 불을 꺼지지 않게 하라고 하셨을까요? 라는 질문보다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꺼지지 않는 재단의 불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라는 질문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백성들은 꺼지지 않는 불을 보며 하나님께서 성막에 항상 계시다는 것을 느끼지 않았을까요?

달리 표현하면 꺼지지 않는 불은 늘 자신들을 기다리는 하나님을 생각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요사이 어떤 교회에서는 담임목사님이 토요일에도 저녁 늦게까지 불을 밝히고 있으면

자신들을 위해 열심히 일하신다고 좋아한다고 합니다.

비교 할 수 있는 얘기는 아닌 줄 알지만 사람들의 심리를 반영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불이 꺼지지 않는 성막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현존의 자리였고,

그 현존을 돕는 자들이 바로 제사장들이었습니다.

제사장이 불을 지피는 일로 백성들이 하나님을 느끼게 할 때,

그것이 검댕이 묻는 일이라 해도 거룩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자신의 일로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떤 것도 드러나게 할 수 없습니다.

제사장 자신의 욕구나, 명성을 위해 일하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로 한 번 튀어 보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오늘의 그리스도인들, 목회자들이 눈여겨봐야 할 대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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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목제로 보내셨도다

레3

3 그는 또 그 화목제의 제물 중에서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곧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4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 쪽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떼어낼 것이요

5 아론의 자손은 그것을 제단 위의 불 위에 있는 나무 위의 번제물 위에서 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화목제 역시 소제처럼 제물의 일부만을 떼어 하나님께 태워서 바치는 제사입니다.

다른 점은 제물의 나머지 부분을 제사장만 갖는 것이 아닌 제물을 바친 사람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레7:11-18, 28-34).

하나님께서는 내장에 낀 기름과 콩팥 정도만 취하셨습니다.

화목제는 그 동기에 따라서 제물의 고기를 다루는 방식도 달랐습니다. 이것은 7장에서 자세히 다루어집니다.


다른 제사들과 달리 화목제는 기쁨을 전제로 합니다.

감사하는 마음, 또 뭔가 해 보겠다고 서원하며 결의에 찬 마음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끌고 간 제물을 모두 태우고 빈손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양 손 가득 나누어 먹을 고기를 들고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족은 물론 이웃과도 나누어 먹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제사가 얼핏 하나님만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만 보이지만,

소제에서는 제사장을, 화목제에서는 가족과 이웃을 생각함으로 그 범위가 확장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화목제는 성막에서 하나님께 드리지만 그 결과는 이웃을 향하는 제사라 하겠습니다.

감사와 서원의 기쁨은 자신을 둘러싼 이웃과 나눌 때 참 의미를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예수님께서 번제나 속죄제나 속건제로 보내지신 것이 아니라 화목 제물로 보내지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른 제사의 제물이셨다면 어떤 한 가지 사안을 위해 일회적으로 바쳐진 것일 수 있으나,

화목제라는 것은 그 제사를 통해 그것을 기억하는 자들에게는 계속적으로 유효한 제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만찬을 통해 당신의 몸과 피를 나누며 다시 오실 때까지 기억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니 화목제의 진정한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다 확실하게 드러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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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계를 대자면 휴가도 있었고, 바쁘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레위기는 들여다 보고 있어도 별로 생각이 진전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제사의 순서들을 설명하는 것도 무의미할 것 같고...
그래도 읽고 또 읽고, 집중하다보면 나름 창조적인 영감이 주어지기도 한다.
그것이 부스러기 한 조각 같더라도 솜사탕처럼 달콤하다.

사람의 일이 아니다.

레2

1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

2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고운 가루 한 움큼과 기름과 그 모든 유향을 가져다가 기념물로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3 그 소제물의 남은 것은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돌릴지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물 중에 지극히 거룩한 것이니라


속죄제, 화목제, 속건제가 목적에 중점을 두었다면 번제와 소제는 그 방법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번제가 짐승을 불살라 드리는 것이었다면 소제는 곡식을 드리는 제사입니다.

물론 번제를 모든 것을 드리는 헌신의 뜻을 담은 제사라고 합니다.

소제 역시 그 제물의 특성상 추수감사의 때나 짐승을 잡기 어려울 때 주로 드리는 제사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소제는 곡식을 드리는 제사인데, 특별히 낱알을 그대로 드리는 것이 아닌 고운 가루여야 했습니다.

굽든 부치든 삶든 간에 그 근간은 고운 가루여야 합니다.

들녘에서 거두어들인 곡식들을 맷돌에 정성스럽게 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가루도 그냥 가루가 아닌 ‘고운’ 가루여야 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요즘처럼 방앗간이 있는 것도 아니고, 돌도 곱게 가는 믹서가 있는 때도 아닌 그 때 고운 가루를 만들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 그 때의 기준이 지금의 밀가루 정도를 요구하지는 않았을 지도 모릅니다.

바치는 사람의 정성 그리고 제사장의 꼼꼼함의 정도에 따라 고운 정도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많지도 않은 곡식 중에서 갈고 또 갈아서 고운 가루를 만들어 오는 사람들의 정성이 소제를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특징은 소제는 번제처럼 전체를 드리지 않고 기념할 정도의 양만을 드리고

나머지는 아론의 자손들이 먹는다는 것입니다.

‘아니 왜 그걸 제사장들이 먹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제사장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하나님께서 백성들이 제사장들을 어느 정도로 생각해 주기를 바라는 지,

또 제사장들 스스로 어떤 자의식을 가져 주기를 바라시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게 하는 대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제사장들을 소중히 여겨주기를 바랐습니다.

그 마음 그대로 하나님 역시 제사장들을 따듯한 시선으로 보고 계신다는 것이고,

제사장들은 하나님께 바쳐진 것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먹으며 자신들의 직임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특권으로 여길 때 아론의 두 아들이나(레 10장) 엘리의 두 아들(삼상 2장)과 같은 그릇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막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를 할 때 사람을 생각하고 하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제물을 준비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고, 그 것을 먹게 되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 과정에서 그들의 마음을 가감 없이 제물로 받으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이렇게 열심히 만든 것을 어느 제사장이 먹을까?’라고 생각한다든지,

‘이 가루는 누가 만들어 온 거지?’ , ‘누가 많이 가져왔지?’라는 식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면 제사의 순수성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생각하기 시작하면 소제의 순수성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주께 하듯 하라는 말씀이 여기서 통하게 됩니다(골 3:23).


흔히 교회에서 주어진 일을 하면서 그 행위를 사람을 의식해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으로부터 대가를 받으려 할 뿐만 아니라 반대로 사람들 때문에 상처받고 교회 전체를 판단합니다.

또 사람을 의식해 자신이 감당해야 할 역할을 축소하거나 심각하게 사기를 잃기도 합니다.

어느 쪽이든 ‘하나님’의 부재에 대해 깊이 성찰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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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만에 다시 시작, 물론 부담은 만땅으로 가지고 있다가...
레위기라는 큰 산을 넘어 보자! 영차~

 

타는 냄새가 향기가 될 때

레1

1 주님께서 모세를 회막으로 부르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일러라. 너희 가운데서 짐승을 잡아서 나 주에게 제물을 바치는 사람은 누구든지 소나 양을 제물로 바쳐라.


레위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 되기위한 교과서이자, 제사장들에겐 직무 매뉴얼입니다.

사실 제사장에겐 삶의 지침서라고 하는 것이 더 나을 듯합니다.

그들이 어떤 생활을 해야 하는 지까지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중 제사규례는 1장부터 7장까지 집중적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레위기를 읽으면서 그 제물이 뭔지, 또 그 절차는 어떤지에 대한 논의는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이 제사규례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려고 하시는 의도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좀 더 생각을 해 보고 싶습니다.

이미 출애굽기에서도 말씀드린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시면 될 듯한데,

소(송아지), 양, 염소, 비둘기를 바치는 행위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행위였다는 것입니다.

성막 역시 하나님이 아닌 사람을 위한 것이었듯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뭐가 부족해서 초라한 천막집이 필요하시겠습니까?

온 세상을 만드시고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인데,

또 뭐가 부족하셔서 짐승을 태우는 고약한 냄새를 향기로 받으실까요?

그래서 단언컨대 사람에게 필요한 과정이었다고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것이라면 지금도 짐승을 불살라 드리는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사람을 위한 것이기에 시대에 따라 바뀔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맞추어진 방식으로 사람을 깊이 배려한 과정이 제사로, 예배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절차를 따르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사람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깨닫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 순서 안에 역할을 감당하는 제사장은 그 절차를 준수해야 합니다.
하나도 빠짐없이, 어김없이.


하나님을 향해 하는 모든 과정에는 눈에 보이는 건물이나 제물에 시야가 좁혀지면 안 됩니다.

그것이 비추어주는 외형에 얽매이면 그 이면에 자리한 하나님과 자신의 존재가 소외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쉽게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물과 자신이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그 어느 것도 나와 떨어져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달리 표현하면 모든 것은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존재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심지어는 책상위에 놓여 있는 연필 한 자루 역시 나를 반영하고 나는 그 연필을 반영합니다.

그러니 나를 감싸고 있는 모든 것들과의 상생이 더욱 설득력을 얻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만약 소, 양이나 염소, 비둘기를 하나님께 드릴 때 그 제물은 자신과 상관없는 어떤 것이 아닌

나의 일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제물을 죽이고, 각을 뜨고, 태울 때 자신 역시 죽임당하고 각이 떠지고 태워지는 것임을 동시적으로 경험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번제를 포함한 제사는 단지 금전적(제물의 비용) 헌신을 넘어 나 자신 전체를 드림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물에 붙는 ‘흠 없는’이라는 수식어는 제물의 상태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제물을 들어 바치는 사람의 마음가짐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정해진 순서와 양(量), 기준들은 그 만큼 하나님을 향한 집중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자신을 아낌없이 드릴 수 있는 사람이 곧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이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십자가와 부활의 현장에도 함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됨이 불가능하면서 어찌 그로부터 오는 은혜를 누리겠다고 말 할 수 있을까요.


제물과 하나 되어 찢기고 태워질 수 있을 때 그 것은 진정한 제사가 되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향기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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