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서신04_살전 4:1-10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이 거룩하기를 원하신다고
바울의 육성을 통해 다시금 전해지고 있다.
거룩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거룩은 하나님의 현존을 느끼는 순간,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맺어진 상황을 뜻한다.
그렇기에 여기서 음란을 버리라는 것,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를 대할 줄 알라는 것,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는 것 등이 부정한 것이 되는 이유이다.
즉 거룩이 하나님을 존재를 느끼는 삶이라면
그 반대는 하나님이 배제된 삶이다.
거룩이 하나님이 충만한 삶이라면
부정한 것은 하나님 아닌 것에 중독된 삶이다.
음란으로 대표되는 몸을 쫓는 삶이 부정한 이유는 마음을 빼앗기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음란한 삶을 우상숭배와 연결시킨다.
왜냐면 이 역시 하나님 아닌 우상에 중독된 삶이기 때문이다.
몸을 우상화한 것이 음란이라는 얘기도 된다.

오늘날의 인류는 내재화된 우상숭배 가운데서 스스로를 속고 있다.
그래서 자신이 우상숭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못한다.
겉으로 교회 잘 다니고 신앙생활의 모양을 잘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과거의 사람들에 비해 더 다양한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고 중독되어 살아가고 있다.
만약 바울이 오늘날의 성도들에게 서신을 보낸다면
정말 다양한 것들을 예로 들으면 거룩하라고 애타는 마음을 전했을 것이다.

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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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은 사랑이다.
레19장
2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사람은 하나님이라는 한 몸에서 태어난 존재들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란 분리됨의 결과물 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각자 다른 모양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자신들의 본래적 정체성을 망각했기에 하나님께서로부터 멀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속적으로 강조하시는 거룩, 특히 레위기를 통해 보여주시는 거룩의 모델은
바로 이와 같은 분리되고 어그러진 관계를 회복시키시려는 과정으로 보입니다.

그것이 부모이든, 가난한 이웃이든, 일꾼이든, 종이든
거꾸로 재판관이든, 부자들이든 간에
서로를 향해 형제라고 말할 수 있게 됨으로
그래서 한 부모 아래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는 존재임을 각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형제로서 산다는 것은 단지 모든 것을 허용하는 관계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하시듯이 바른 원칙을 갖고 그 쪽으로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 전재됩니다.
왜냐면 천지창조에서 보여주셨듯이 하나님은 혼돈의 하나님이 아니라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질서는 단지 사람과의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짐승에서 식물에까지도 적용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고자하는, 하나님의 백성 됨을 깨닫는 사람은
사람과 일, 사물을 보면서 사람의 기준과 원칙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과 원칙, 즉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좇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이미 그 모든 것에 하나님께서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보지만 하나님을 보고, 짐승을 보면서도 역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마치 야곱이 형 에서의 얼굴을 보며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 같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 하듯 한다는 것이 바로 거룩한 삶이 아닐까요.

만물에 깃든 하나님, 그 생명을 알아 볼 수 있는 눈을 키우고,
그 모든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 아끼는 마음을 가지는 것
그로부터 하나님의 마음과 만남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관계를 나누고 차별하다 못해 멸시하고, 적대하다 못해 학대하며, 책임전가하는 것이 아닌
모두 하나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됨 안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 마음은 결국 당신을 모함하고, 때리고, 채찍질 하고, 십자가에 못박기까지 한 사람들을
용서하며 품으신 예수님의 모습에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삶을 거룩한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그 안에 하나님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한 형제로 볼 뿐만 아니라
바로 자신으로 느끼고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겐 너와 내가 따로 없고, 그 누구도 하나님과 따로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으셨습니다.
그 분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를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땅에 살지만 하늘을 만날 수 있는 삶,
마음 열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곁에 있는 이들을 사랑하는 삶.
이것이 거룩한 삶입니다.

추가>
그래서 사람이 사람을 만난 때, 내 안에 하나님과 상대방 안의 하나님이 만나는 것.
그러므로 결국 내가 나를 만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희로애락이 나의 것이 된다.
같이 느끼는 세상, 거룩한 공동체를 이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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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장받은 기간
레12장
7 제사장은 그것을 여호와 앞에 드려서 그 여인을 위하여 속죄할지니 그리하면 산혈이 깨끗하리라 이는 아들이나 딸을 생산한 여인에게 대한 규례니라

남아를 낳으면 - 7일 부정, 33일 후 산혈이 깨끗하여 짐
여아를 낳으면 - 14일 부정, 66일 후 산혈이 깨끗하여 짐
번제(일 년 된 어린양)와 속죄제(집비둘기나 산비둘기)를 드림
힘이 양에 미치지 않으면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세 마리

하나님께서 출산을 한 여인이 남아든 여아든 정해진 기간이 지나 산혈이 깨끗해 질 때
번제와 속죄제를 드려야 한다는 규례를 주십니다.
산혈이 깨끗해지고 속죄제를 드리는 것인지, 속죄제를 드림으로 산혈이 깨끗해지는 지는 명확하지는 않지만
분명한 것은 정해진 기간에 맞추어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남아를 낳았을 때와 여아를 낳았을 때의 기간이 다른 지에 대한 이유는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남성과 다른 여성의 특별한 신체와 관련한 규례는 15장의 유출병과 이곳에 있는 출산과 관련되어 등장합니다.

이 율법대로 한다면 출산한 여인은 최소한 40일에서 80일 동안은 분리된 생활을 해야 했을 것입니다.
격리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본인은 물론 가족과 주변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대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출산한 여인에 대한 배려를 하신 것은 아닐까요?
요즘 말로 하면 몸을 풀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보장해 주신 것일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렇다면 남아는 40일, 여아는 80일이라는 문제가 또다시 나오는데,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여아를 낳은 것으로 특별히 산모를 더 쉬게 해 줄 필요는 없어 보이니까요.

이 문제를 원죄의 문제와 연결시키는 이도 있는 것 같은데,
가볍게 성경을 읽어 가면서 그런 복잡하고 고차원적이기까지 한 추론을 하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공동체 내에서 여인이 출산을 했을 때의 규례를 정해 주심으로
여성들이 감당하는 중요한 역할을 공식화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기간은 아이를 출산했을 때, 지켜야 할 기간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 여인에겐 보장받은 기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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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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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이 무슨 뜻인지 아세요?
레11장
44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길짐승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4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육지의 모든 생물 중 먹을 만한 생물 -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
먹지 못할 생물 - 두 가지 조건 중 하나만 충족하는 집승(낙타, 사반, 토끼, 돼지)
물에 있는 것 -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것
새 중 가증히 여길 것 - 독수리, 솔개 물수리, 말똥가리, 말똥가리 종류, 까마귀 종류, 타조, 타흐마스, 갈매기,
                                새매, 올빼미, 가마우지, 부엉이, 흰 올빼미, 사다새, 너새, 황새, 백로, 오디새, 박쥐
혐오할 곤충 -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어나는 것
먹을 수 있는 곤충 - 앞의 조건에 뛰는 다리가 있는 것(메뚜기 종류, 베짱이 종류, 뀌뚜라미 종류, 팥중이 종류)


이쯤에서 거룩이라는 말을 정의해야 할 것 같습니다.
거룩의 정의를 하기 전에 제 경험담 하나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시절에 열심이 특심이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친구와 금요 철야기도회를 여의도순복음교회로 다녔습니다. 학기 중에는 가끔 가고, 방학 때는 거의 매 주 갔던 것 같습니다. 다 아시겠지만 순복음교회의 특징은 뜨거운 기도에 있습니다. 2,3시간여의 1부 예배가 거의 12시까지 진행되는데 마칠 즈음 뜨거운 통성기도를 합니다. 그것이 마치는 쉬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쉬는 순서가 있었다기 보다는 그 때가 쉬기에 적당해서 늘 밖에 나와서 어묵 같은 것을 사 먹고 들어갔습니다. 어느날 쉬는 시간에 나가려고 하는데, 옆에 앉아 있던 아주머니께서 아무래도 순복음교인 같지 않다는 생각을 하셨는지 '어디서 왔냐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장로교회에서 왔다고 했더니, '아하~ 그 거룩 거룩 하는 데요!' 하는 겁니다. 물론 평소 장로교인들의 모습을 거룩거룩한다고 표현하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렇게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듣는 것은 좀 당혹감이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순간 제 입에서 나온 말은 ' 거룩이 무슨 뜻인지 아세요?'였고, 그 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출출한 배를 채우고 들어와서는 좀 미안한 마음에 좀 전에는 죄송했다고 사과를 했고, 아마 그 아주머니도 겸연적어 하시며 미안하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다른 교회에까지 가서 철야집회에 참석할 정도의 청소년을 너무 과소평가 했던 거죠.

아무튼 그 당시 저는 거룩에 대한 분명한 뜻을 알고 있다고 자부했었습니다.
그 뜻은 '죄와 분리된 상태'였습니다.
그러면 레위기 11장에서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는 짐승들을 말씀하시며 요청하시는 거룩의 뜻이
제가 어린 시절 배워 알고 있었던 그것과 같은 것일까요?
거룩의 뜻을 사전적으로 찾을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께서 이 거룩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사용하셨는지를 살펴보는 것으로도 그 뜻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 것이 더 정확한 뜻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 2:3)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5)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태에서 처음 난 모든 것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출 13:2)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출 20:8)

안식일을 명하시며, 모세를 만나 신을 벗으라고 하시며, 유월절을 재정하시며, 또 위에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성막과 제사장과 관련하여 반복해서 거룩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거룩이라는 단어는 사람과 사람 간에서 나온 말이 아닌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어서 나온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사람 쪽보다는 하나님 쪽에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거룩은 단지 깨끗하다 더럽다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셨을 때 깨끗할 장소가 어디며, 깨끗할 사람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거룩은 더럽고 추한 것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기억하는 장소와 사람에게 주어지는 칭호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백성이라는 것은 수평적인 비교를 통해 어떤 특별함이 아닌 것입니다.
안식일이라는 한 날이 거룩한 것이 아니라 그 날을 하나님의 이름을 기념하기에 거룩한 것이고,
모세가 선 땅이 거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곳에 계셨기 때문에 거룩한 것이고,
처음 난 것이 거룩한 것이 아니고 그것이 하나님께 바쳐지기 때문에 거룩한 것입니다.
그러니 반대로 부정하다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부정한 어떤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재의 상태가 부정한 것입니다.

부정한 동물과 정한 동물을 이야기 할 때
깊이 들어가면 그것의 생물학적 이유들을 뒷받침해서 논의를 진행할 수도 있겠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는 것들을 먹는 것이 건강에 좋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기도 합니다.
뭐 그럴 수도 있고 안 그럴 수도 있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이 하나님과 만나는 것을 전제로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의복을 입을 때 거룩한 옷을 입은 거룩한 제사장이 되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의 삶을 전제로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식생활에 대한 규례들을 받을 때 그 음식은 거룩해 지고 백성들은 거룩한 백성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 짐승이 어떠한 것은 상관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조금 복잡해 지기는 했지만 무슨 말을 하려는 지는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어떤 것은 거룩하고, 어떤 것은 정하다 혹은
어떤 사람은 죄인이고, 어떤 사람은 의인이다 라는 식의 이분법적인 사고를 지양하지는 얘기입니다.
예를들어 주초의 문제만 놓고 봐도 어떤 교회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고 또 어떤 교회에서는 정죄가 됩니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을 붙들고 이러쿵 저러쿵 에너지를 소비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중요한 것은 레위기 11장에 나오는 정한 동물과 부정한 동물이 어떤 것이냐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의 자세를 잡아가는, 그래서 하나님과 소통하는 사이가 되어
결국 하나님께서 '거룩하다'라고 인정하는 백성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존재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단절된 채로
자신의 어떤 것을 통해 거룩함에 이르려고 합니다.
나름대로 외형을 꾸미고, 자기식의 신앙생활의 틀을 갖추어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전혀 상관이 없음으로 아무리 최고의 길을 가더라도 격하게 표현해 부정한 상태하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안에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가 있고,
그 만남을 전제로 한 준비의 과정이 있다면 지금 아무리 형편없는 상태라 해도 거룩한 그리스도인이라 하겠습니다.

좀 더 생각해 보면 교회라 할지라도 하나님과의 만남의 자리가 될 수 없다면 거룩한 곳이 아니며
공터 한 모퉁이 볼품없는 곳에 천막을 친 곳이어도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곳이라면 거룩한 곳이 되는 것입니다.
마치 소냐 돼지냐를 가르듯 눈에 보이는 모습만으로 정·부정을 가르라고 이 말씀을 주신 것이 아님을 오늘은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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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사람들

레5

7 만일 그의 힘이 어린 양을 바치는 데에 미치지 못하면 그가 지은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여호와께로 가져가되 하나는 속죄제물을 삼고 하나는 번제물을 삼아


가난한 자들의 속죄제물

힘이 흠 없는 암염소, 흠 없는 어린 암양에 미치지 못할 때,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

힘이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에 미치지 못할 때 또는 고운 가루 십분의 일 에바



하나님은 백성들의 형편을 고려하셔서 힘이 미치지 못할 때는 덜 부담이 되는 제물을 바치도록 배려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속죄제를 삶 가운데 자연스럽게 여기기를 바라셨기 때문에

제사를 지내는 일이 부담이 되지 않게 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거룩한 백성이 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마음과도 닿아 있습니다.

다른 제사는 상황에 따라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지만

속죄제는 허물이 생겼을 때에는 누구나 언제든 드려야 하기 때문에

그 문턱을 낮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거룩한 백성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늘 스스로를 돌아보고 정화하는 의식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역시 거룩한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돌아보는 과정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의 현실은 그렇지 않은 듯합니다.

교회는 대부분 성도들의 지친 몸과 마음의 쉼과 위안에 초점을 맞추어져 있고,

조금 낫다고 하는 교회가 봉사와 선교를 강조하는 교회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거룩해 지기 위한 자기반성을 위한 절차를 교회 안에 담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죄를 사함 받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세상 가운데서 끊임없이 범죄하고 허물투성이가 될 수밖에 없는데

타당한 절차를 통해 자복하고 용서함을 받을 수 있는 채널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요즘 교회 안에는 자칭 의인들로 가득합니다.

구조적으로 그것을 고착화 하고 권장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것을 명심하고, 스스로 돌아보아 거짓된 삶을 자복하고 통회하는 예배를 드리며

스스로의 한계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하심을 경험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때

그는 진정 거룩한 그리스도인으로 한 걸음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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