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앞에 설 때
레10장
3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이르시기를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겠고 온 백성 앞에서 내 영광을 나타내리라 하셨느니라
아론이 잠잠하니라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죽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시지 않으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다가 죽었습니다.
9절 '너와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 그리하여 너희 죽음을 면하라'는
말씀으로 미루어 볼 때 아마도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엉뚱한 불을 담아 들고 들어 간 것입니다.
아론이 첫 제사를 드리고 곧 이어 이런 참담한 일이 생기다니 특히 아론에겐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를 향해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지 말라고 명합니다.
아론의 가족들은 입술을 깨물며 슬픔을 안으로 삭여야만 했습니다.
두 아들을 잃은 찢어지는 아픔보다도 하나님의 입장에 서야 하는 것이 제사장임을 몸소 체험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은 다른 존재임을 인식해야 했습니다.
그들이 하는 일이 하나님의 일도 아니지만, 또 사람의 일도 아닌 것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선 중개자 였습니다.
땅에 발을 딛고 선 사람 중 가장 먼저 하나님의 시선을 접해야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해이한 마음과 자세로 자신들의 일을 한다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둘의 죽음은 애석하지만 이 일로 남은 자들에겐 분명하게 각인되었을 것입니다.
더불어 이들의 죽음으로 더 큰 재앙(더 많은 죽음)을 면할 수 있게 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제사장들은 하나님께 더 가까이 있기에 하나님을 더 욕되게 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사람들의 눈에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사람들이 제사장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또 제사장들을 통해 이스라엘 전체 수준이 결정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후 이스라엘을 향한 심판의 말씀에서 대개 지도자들의 타락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시겠다는 말씀은
비단 목회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새겨들어야 합니다.
많은 교회들이 전도를 위해 총력을 기울이며 프로그램을 만들고 전도 훈련을 하지만,
정작 그들의 '제사장적 삶', '하나님 앞에 선 자의 삶'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기에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 일들이 벌어지고,
그들이 그리도 인도하고 싶어 하는 교회의 사회적 신뢰도는 추락에 추락을 거듭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미 사람들이 등을 돌렸고, 하나님도 눈살을 찌푸리시지 않을까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삶의 거룩함을 회복하는 것 이상의 전도 프로그램은 없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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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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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하여
레9장
7 모세가 또 아론에게 이르되 너는 제단에 나아가 네 속죄제와 네 번제를 드려서 너를 위하여,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고 또 백성의 예물을 드려서 그들을 위하여 속죄하되 여호와의 명령대로 하라

아론_속죄제(송아지), 번제(숫양)
이스라엘 자손_속죄제(숫염소), 번제(송아지, 어린양), 화목제(수소, 숫양, 소제)

아론의 제사가 시작됩니다.
아론이 처음으로 드린 제사는 백성의 것도, 아들들을 위한 것도 아닌
바로 자신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자신을 위한 속죄제와 번제를 드린 후에 백성들의 제사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늘 나 아닌 누군가를 향한 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냅니다.
만약 제사장이라면 오늘 누구의 제사를 드릴 것인지 얼마나 성공적으로 할 것인지에 집중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제사장이 된 아론이 먼저 드린 제사는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시선과 손은 자연스럽게 밖으로 향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먼저 '나'입니다.
자신이 제사장으로서 하나님 앞에 거룩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제사를 집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신을 깨끗이 하고, 자신을 드리는 시간 없이 다른 사람들에게 나아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에서 분주하게 봉사하면서
정작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맺고 있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순서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라 하겠습니다.
외부로 드러나는 행동에 집중하다 보니 홀로 자신을 돌아보는 일을 소홀히 한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교회들은 그런 깊은 그리스도인을 원하지 않는 지도 모릅니다.
외형에 치중하며 소모적이기까지 한 교회의 자화상이라 하겠습니다.
문제는 일반 그리스도인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교역자들의 삶 역시 예외가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삶이 반영된 제물을 손수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속한 곳에서 하나님 앞에 세상을 등지고 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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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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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을 나누다.
레8장
2 너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과 함께 그 의복과 관유와 속죄제의 수송아지와 숫양 두 마리와 무교병 한 광주리를 가지고 3 온 회중을 회막 문에 모으라

제사장 위임식 : 속죄제(수송아지), 번제(숫양), 위임식(숫양)

성막의 제단은 그 제단을 사용할 자들인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위임식을 위해 처음으로 사용됩니다.
실로 역사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세 역시 하나님께서 이르신 말씀을 그대로 따르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조심스러웠을 것이고,
이것을 지켜보는 백성들 또한 긴장감을 감출 수 없었을 것입니다.
위임식의 당사자들인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말할 필요도 없겠습니다.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은 백성들과의 소통을 위해서(출 18), 제사장은 하나님과의 소통을 위해 세워집니다.
전자는 이드로의 충고에 의해, 후자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세워진 것이 다릅니다.
드디어 일반 백성들에게 하나님과 만남을 안내 할 사람들이 세워진 것입니다.
직접 하나님을 만나서 대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어느 방법보다도 안전한 방법을 갖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아론이 출애굽 초반부터 협력자의 자리에 있긴 했지만 뚜렷하게 정해진 역할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제사장이라는 분명한 직임을 갖게 됩니다.
이로써 모세는 함께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생긴 것이고,
아론과 더불어 그의 아들들에게도 함께 위임하면서 그 책임의 지속성도 보장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날의 위임식은 하나님과 백성을 향한 책임을 나누는 예식이었습니다.
모세는 여기서 우려하는 마음도 들었겠지만, 홀가분한 마음이 더 컸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일들을 감당해 왔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이렇게 사람을 하나 둘 세우며 결과적으로는 하나의 민족을 세워갑니다.

목사로 안수 받는 임직식과 비교 할 수는 없으나 그 의미는 유사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선배 목사들이 지금까지 짊어지고 오던 일들을 함께 짊어지자고 하는 일이 임직식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수적 포화상태라는 것을 비판하며 눈살을 찌푸리는 것이 아니라
책임을 나누게 된 것에 대한 축하하며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교회뿐만 아니라 어떤 단체, 조직에서도 새로운 사람들이 세워지는 것을 두려워하기보다
환영하며 기뻐할 것은 함께 짐을 나누고 책임지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 이런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십시오.(갈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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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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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 내지 않도록
레7장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화목제물 중에서 그 흔든 가슴과 든 뒷다리를 가져다가 제사장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주었나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받을 영원한 소득이니라

레위기 7장에서 제사를 통해 제사장과 그의 가족들에게 돌려지는 몫
속건제물_제사장인 남자가 거룩한 곳에서 먹음(6절)
번제물_번제를 드리는 제사장이 번제물의 가죽을 가짐(8절)
소제물_기름 섞은 것이나 마른 것이나 모두 아론의 모든 자손이 균등하게 분배(10절)
화목제물_거제로 드린 것을 피를 뿌린 제사장에게 돌림(14절)
           흔든 가슴과 든 뒷다리를 제사장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줌(34절)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 제사를 위해 제물을 준비해 온 백성들은
제물의 일부 또는 대부분이 제사장들의 몫으로 돌려질 때 어떤 생각을 했을 지 궁금합니다.
더구나 그들이 가지고 온 짐승이나 곡식은 최상의 것이었을 텐데 말입니다.
아깝지 않았을까요?

백성들이 그러하듯 제사장들에게도 먹고 사는 것이 중요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일반 백성들처럼 농사를 짓고 장사를 할 수 없었기에 제사장은 화려한 겉모습과는 달리 풍요로울 수 없었습니다.
물론 백성들이 바친 십일조는 레위인들, 또 레위인이 바친 십일조는 제사장들의 것이 되었지만
그 것이 그들에게 충분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러니 제사장들은 성막에서 제사를 집례 할 때마다 유혹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조금만 융통성(? 잔머리)을 발휘하면 자신이나 가족이 배불리 먹을 고기와 곡식을 챙길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을 미연에 방지하시기 위해서인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의 과정에서 제사장들의 몫을 정확히 정해 주셨습니다.
아마 제사장들도 제사를 집례하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임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소위 거룩한 직임을 감당하면서 생계를 걱정하지 않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삶에서의 곤궁함은 때론 사심으로 사명을 무너지게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자신들의 것으로 정해진 몫이 있었기에 평안한 마음으로 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제사장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몫 이상을 요구하게 되거나,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정해진 몫을 제사장들에게 돌리지 않을 때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은 이런 함정에 빠진 예라 하겠습니다(삼상 2:12-17).
그런데 요사이는 몇몇 목회자들이 자신의 몫 이상을 가져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 내의 사람은 물론 일반인들의 눈살까지도 찌푸리게 합니다.
반면 어떤 힘 있는(?) 성도들은 목회자의 정당한 몫을 주지 않으려고 힘겨루기를 합니다.
과연 그 교회의 목회자가 평안 가운데 사역을 감당하기를 바라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목회자가 자신의 생계, 먹고 사는 문제를 걱정하기 시작하면
제대로 된 목회사역을 하기를 기대할 수 없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조차도 인정하신 부분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됨을 변호하면서 당연히 받을 것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는 전제로 아래의 말을 합니다.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고전 9:13)
바울처럼 자비량 사역을 할 수 있는 형편이 된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바울의 사역방식은 이상적인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비단 교회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에는 똑같이 일을 하고도 자신의 몫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반대로 자신이 한 일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것을 챙기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반복될 때 사회는 불안해 지고 작은 사람들의 한이 쌓여 가는 것 같습니다.

현재 교회가 직면한 어려움은 어떤 한 가지 부분만 진단하고 처방한다고 해결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말씀을 통해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근접해 지려는 노력은 계속 되어야 합니다.
바울과 같은, 아니면 또 다른 새로운 패러다임이 가능하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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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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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지피는 사람들

레 6장

13 불은 끊임없이 재단 위에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라


성경말씀에 구체적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제사장들은 여러 분야로 서로 다른 일을 감당했을 것입니다.

모세가 이 말씀을 받아 전할 때에야 아론과 네 명의 아들이 제사장의 일을 했지만

이후에 후손들이 많아져 제사들이 많아졌을 때는 각각의 맡은 일들을 감당했겠죠.

잘 아시듯 다윗의 때에는 제사장들이 많아서 가족별로 반차를 나누어서 봉사하게도 했습니다.

제사장들이 맡은 일 중에서 가장 잘 해야 하는 부분이 불과 관련된 부분인 것 같습니다.

왜냐면 재단의 불은 절대로 꺼지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아궁이의 불을 꺼뜨리지 않으려는 과거 우리네 아낙네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면 조금은 이해가 될 것입니다. 

제사장은 혹시 재단의 불이 꺼지지 않을까 노심초사 하며,

불을 지필 장작들도 충분히 확보를 해 두어야 하고, 날씨의 변화도 예민하게 관찰을 해야 했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재단의 불을 꺼지지 않게 하라고 하셨을까요? 라는 질문보다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꺼지지 않는 재단의 불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라는 질문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백성들은 꺼지지 않는 불을 보며 하나님께서 성막에 항상 계시다는 것을 느끼지 않았을까요?

달리 표현하면 꺼지지 않는 불은 늘 자신들을 기다리는 하나님을 생각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요사이 어떤 교회에서는 담임목사님이 토요일에도 저녁 늦게까지 불을 밝히고 있으면

자신들을 위해 열심히 일하신다고 좋아한다고 합니다.

비교 할 수 있는 얘기는 아닌 줄 알지만 사람들의 심리를 반영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불이 꺼지지 않는 성막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현존의 자리였고,

그 현존을 돕는 자들이 바로 제사장들이었습니다.

제사장이 불을 지피는 일로 백성들이 하나님을 느끼게 할 때,

그것이 검댕이 묻는 일이라 해도 거룩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자신의 일로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떤 것도 드러나게 할 수 없습니다.

제사장 자신의 욕구나, 명성을 위해 일하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로 한 번 튀어 보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오늘의 그리스도인들, 목회자들이 눈여겨봐야 할 대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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