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를 하나님과 만남이라고 할 때, 그 만남을 이끌어 가는 쪽은 어디일까?
물론 만남이기에 쌍방이 적절하게 이끌어 간다고 하면 되지 않겠냐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그런 대답을 하기에 부끄럽게도 지금까지 대개의 기도는 하나님은 배제한 채
자신이 일방적으로 이끌어 왔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누군가를 만날 때 한 쪽에서 일방적으로 주도했을 때 상대방의 기분이 어떨까?
더구나 그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어떠셨을까 생각해 보자.
그리고 지금까지 소위 하나님과의 만남은 잘 되었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만약 조금이라도 찔림이 있다면 이제 주도권을 넘겨 드릴 때가 되었다는 신호가 온 것이다.
하나님과의 대화를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시도록 내어드리는 것
그것이 우리의 기도를 한 차원 높여 주는 길이 될 것이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우리의 기도를 성령께 맡기는 것이다.
내 안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분심들을 잠잠하게 하고
온전히 그 분을 인식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고,
그래서 그 가운데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지금까지 대부분은 분심 그 이상으로 쉼없이 이어지는 말들을 늘어 놓는 것을 기도라고 여기고
한 순간의 끊김도 없이 쏟아 놓고 나올 때 시원하다고, 기도가 잘 되었다고 여겼지 않은가?
그러나 이젠 조용히 앉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다.

그러면 침묵으로 가만히 있으면 될까?
솔직히 침묵으로 가만히 있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아무리 분심들을 잘 처리하게 되었다고 해도 사람이 죽지 않는 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살아있다는 증거이니 너무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는 없다.

그래서 성령의 이끄심에 나를 맡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뭐 다양한 방법이 있을 수 있겠으나 단순기도를 하는 것을 제안할 수 있겠다.
예수의 기도, 즉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시여 죄인인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를 반복할 수 있다.
좀 길면 '예수여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줄이거나, '예수님!', '주님!'등으로 더 줄여서 할 수도 있다.

또 예수마음기도를 할 수 있다. 
내가 선택해서 하고 있는 것은 '당신의 탁월하신 친절에, 저를 온전히 합하나이다'이다.
'예수마음의 사랑이여, 제 마음을 불사르소서'나
'예수마음의 자비여, 제 마음을 용서하소서' 등을 반복할 수도 있다.
(예수마음 호칭기도문 가운데 선택)

단순기도는 기도문을 되뇌이거나 공염불을 하는 것이 아니다.
한 자 한 자를 생각하며 기도하는 것이다.
기도 중 하나님의 현존이 느껴지면 멈추어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가 다시 분심이 떠오를 때 기도문으로 돌아간다.
조금 어렵다고 생각되면 호흡과 맞추어 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들숨에 '당신의 탁월하신 친절에'. 날숨에 '저를 온저히 합하나이다'를 반복한다.

기도문이 내 마음에 들어오는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성급한 마음에 뭔가 성과를 얻으려고 달려들면 안 된다.
지난 시간 나 중심의 기도습관에 너무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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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중 일어나는 분심에 미래의 일, 현재의 일과 함께 과거의 일이 있다.
계획하고 걱정하고 근심하는 일들이 떠오를 때는 그것을 대하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고
또 기도시간이 아닌 다른 시간에 만나주겠다고 약속을 하며 보내고
다시 기도로, 주님 앞으로 돌아오면 된다.
이 것이 미래와 현재의 일에 대한 태도이다.
그렇다면 과거의 일이 떠오를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과거의 일이란 어떤 사회적 사건들을 말하는 것이 아닌 내가 경험한 일들을 말한다.
특히 여기서 말하는 과거의 일이란 알게 모르게 현재의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일일 수 있다.
그래서 과거의 일이 떠오를 때는 정면으로 만나 보는 것이 좋다.
하지만 과거의 일이 중요하다는 이유로 일부러 끄집어 내려 애쓰거나, 회상을 하라는 말은 아니다.
자연스럽게 찾아 오는 것을 만나라는 말이다.

과거 상처와 좌절이 무의식의 세계에 잠재되어 자신에게 영향을 주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그것이 불현듯 떠오를 때 오늘 자신이 안고 있는 문제를 풀 수 있는 키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것이 중요한 이유는 그런 상처와 좌절의 기억이 해결되지 않을 때,
그것들은 자신 안에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자극하여 하나님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과거의 기억을 어둠에서 빛으로 이끌어 내는 작업을 기도 중 할 수 있다.
그 시공간으로 들어가 하소연도 하고, 고발도 하고, 탄원하고 청원하는 시간을 가지게 될 때
묶였던 족쇄가 풀리듯 감사와 기쁨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칠 때 더욱 가벼운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이다.

기도의 목적은 여기에 있다. 하나님 앞에 서는 것!
과거의 일을 만나는 작업 역시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드리기 위한 준비 과정임을 기억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나의 기도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는 내 마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움직임을 바라보는 것'이 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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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를 하면서 다른 생각이 떠오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소위 분심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면 쉼없이 떠오르는 분심을 어떻게 할까?
그 분심이 어디로부터 오는 지, 정체가 무엇인지를 알아가는 과정을 기도 안을 가져 오는 것도 좋을 듯 하다.

"중요한 것은 분심이 없는 것이 아니며, 그 많은 분심들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아내는 작업 역시 기도임을 아는 것이다." 예수마음기도(권민자 지음, 성바오로) 52p

기도할 때 주로 떠오르는 분심에는 세 종류가 있다고 한다.
미래의 일들, 현재의 일들, 과거의 일들이 그것이다.

미래에 대한 분심은 뭔가 계획을 세워야 하는 일들과 관련되거나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을 때 불안함과 함께 오게 마련이다.
그러면 일단 그 생각이 들었을 때 그 실체를 알아차리고
계획을 세우는 시간을 주겠다고 하거나,
어떻게 될지 두려워하는 일은 내가 생각하는 대로 되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닌
지금 기도 가운데서 크게 일어나는 불안한 마음을 그대로 아뢰는 것이다.
그리고 그 미래적 분심을 지나 가도록 하고 다시 기도로 돌아오면 된다.

기도로 돌아온다는 얘기는 지금 나를 만나고 계신 하나님과의 만남에 집중한다는 것을 뜻한다.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걱정하고 근심하는 데에 기도의 시간을 쓰지 말고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의탁) 지금 나를 만나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현재에 대한 분심도 마찬가지다.
죽고사는 문제가 아니라면 달래서 보내고(맡기고) 기도로 돌아와야 한다.
그러나 현재 자신이 처해 있는 절박한 상황 때문에 도저히 마음에 평온을 찾을 수 없다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이야기 하는 시간을 갖는 것도 필요하다.

물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온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면 기도 시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생활 가운데서도 분심에 이끌려 살아왔기 때문에
어떤 것이 하나님 앞에 앉아 있는 '나'인지 잘 모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를 덮고 있는 구름들을 걷어가는 과정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진 않을 것이다.

가만히 앉아서 '예수마음기도'를 반복할 때 거의 사투를 벌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반복해서 하는 말이지만 정말 '쉴 새 없이' 별의 별 생각들이 다 떠오르기 때문이다.
하다 보면 '나는 어디에 있을까'라는 생각이 번득하고 일어난다.

기도의 방법이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기도가 하나님과 만나는 것이라면 그 만남을 방해하는 것들을 방치한 채로 기도할 수 있을까?
(계속)

(1. 예수마음배움터에 다녀온 후 노트 필기한 것과 내 생각을 정리하는 것  2. 위에 언급한 '예수마음기도'(권민자)라는 책을 주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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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하나님과 만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도의 성패는 하나님과 만남을 잘 가졌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있다.
그렇다면 기도, 하나님과의 만남을 가장 방해하는 것은 무엇일까?
분심일까? 그럴 수 있겠다.
쉼 없이 일어나는 생각들이 기도를 방해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기도하며 이 분심을 잘 살펴보면 오히려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을 돕는 소중한 소재가 될 수 있다.
내 마음이 어디에 묶여 있는지, 또 어떤 쪽으로 향하고 있는 지를 알아챌 수 있도록 해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도 가운데 분심을 정면으로 만나고 대화를 시도하며 그 정체를 알아가게 될 때
내 마음 안이 정리가 되고 결국에는 내 속 깊은 곳으로부터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자신의 계획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내 생각과 내 의지를 비우고, 쉼 없이 떠오르는 분심들을 하나하나 만나고 정리하며 위로하고 화해하다 보면
결국 하나님, 그 분과의 방해 받지 않는 만남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기도는 내가 의지적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끄신다는 것을 고백할 수 있게 된다.
물론 하나님 앞에 있기 위한, 그리고 분심과 만나기위한 최소한의 훈련과 노력은 필요하다(예수마음기도).

그래서 기도를 정말 방해하는 것은 분심이라기보다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들이다.
자신의 의도, 자신의 생각대로 되게 하고자 하는 것들,
예를 들어 '기도의 제목'을 빙자해 끝없이 이어지는 '되게 해 달라'는 기도들 말이다.
문제를 해결해야겠다고, 위로를 받겠다고, 복을 받겠다고 하는 기도들도 여기에 포함된다.
엄밀히 말해서 이런 것들은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만남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 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자기 주도적 기도의 목표들이 가득할 때 하나님이 다가 오시기 너무 힘들어 진다.
쉽게 그려보면, 하나님께서 기도자의 얘기가 끝나기를 기다리시다가 지쳐서 돌아가시는 형국인 것이다.
자신의 의지가 강하면 강할수록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요원할 뿐이다.
마치 하나님을 목석으로 만든 우상으로 생각하는 것과 같다. 왜냐면 내 얘기만 들으면 되는 거니 말이다.

자기 이야기만 하고 오는 것이 기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
나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시는 하나님, 기도 가운데 나를 만남으로 초대하시는 성령님이 주도권을 가지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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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을 오래 해 오면서 기도에 대한 컴플렉스를 한 번 쯤 가져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저 사람은 저렇게 집중해서 기도를 잘 하는데, 나는 왜 시작만 하면 바로 딴 생각을 하는 거지?'
'저 사람은 저렇게 긴 시간 열정적으로 부르짓는데, 나는 왜 할 말이 별로 없는 거지?' 등등

특히 딴 생각의 문제는 쉬 해결되지 않는 것 같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잡념들, 그리고 심지어 졸음까지.
그래서 조용히 기도하는 것 보다는 통성으로 기도하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다.
일단 자신의 소리를 들으며 다른 것에 신경쓰지 않고 집중할 수도 있고,
슬쩍 졸음으로 빠지는 일도 방지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통성기도라는 것이 모두에게 잘 맞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통성기도는 자신의 이야기만 일방적으로 하다보니
그 기도가 정말 하나님과 대화라고 할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기에
사실 마음 속으로부터 추천하고 싶은 기도는 아니다.
물론 기도를 성령께서 이끄신다고 할 때 내가 하는 말이 내가 하는 말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고,
통성기도 후에 갖는 심적 평안을 응답이라는 차원으로 설명하려 할 수도 있겠으나,
여전히 발산하는 것(한 풀이) 이상 어떤 의미가 있을까 생각한다.
(지극히 개인적 소견으로...)

할 수만 있다면 기도를 하나님과 소통하는, 하나님 만나는 시간이 되도록 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그래서 가만히 앉아서 기도하게 될 때 앞에서 말한 것처럼 쉼없이 일어나는 다른 생각들이 문제다.
사실 이전까지는 이것을 잡념들이라 생각하고 '나는 기도가 잘 안 되'라고 생각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더 세게 통성으로 기도하는 것을 사모하고 그렇게 쉼없이 내 이야기를 쏟아 놓을 수 있었을 때
스스로 크게 위안을 얻고 기도 잘 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번에 예수마음배움터에서 영성피정을 하면서 이 잡념들의 실체에 대해 알게 됐다.
잠잠해야 할 기도 시간에 떠오르는 잡다한 생각들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좀 다른 말로 표현해서 '분심'이라고 하는데,
이 분심이 바로 나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는 것이다.
내 안의 무의식의 공간에서 끊임없이 의식으로 올라오는 생각들을 잘 살펴 보면
일종의 패턴이 있고, 그 패턴을 알게 되면 현재 나를 지배하고 있는 상처나 아픔의 그림자를 알게 되는 것이다.
물론 모든 분심이 다 그런 것을 대변하지는 않기에 잘 살펴보고
경중을 따져보고 흘려 보낼 것은 흘려 보내고, 확인해 볼 것은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놀랍고 재미있는 것은 기도 시간에 이 작업을 편한 마음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앉아서 마치 아빠 앞에 아이가 이야기 하듯
자신 안의 이야기들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하면 된다.
심지어 자신을 얽어 매고 있었던 과거의 어떤 시공간을 접하게 되었을 땐
그 자리에서 그 사람들과 대화를 하며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감정을 그대로 풀어 놓는 것이다.
그렇게 분심을 알아차려 가다 보면 그 분심들에 가려져 있던 내 안에 하나님을
아무런 장애물 없이 만나게 되는 것이다.

분심은 내가 살아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 분심에 끌려 다니기 보다 그 분심의 정체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
분심은 습관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을 만나면서도 우린 상대방의 말을 듣는 것 같으면서도 금세 자신의 생각으로 돌아와 버린다.
그러다보며 자신의 이야기만 하기에 급급하기 마련이다.
만약 기도를 통해 분심을 알게 되고, 조절할 수 있게 된다면
사람들과의 만남 또한 변화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과 진솔한 대화가 가능한 사람이 또한 사람과의 진실된 만남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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