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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작년에 쉬었던 물주기 사역을 다시 하게 되었다.
지난달에 서울에 두어 차례 갈 일이 있었기에 이번에는 가지 않으려고 하다가
운전자가 필요하다는 친구의 간곡한 부탁이 있어서 자의 1/3, 타의 2/3로 사역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것도 선발대부터 말이다(나중에는 후발대까지 하게 됨).

물주기 사역은 일단 뿌리기 사역이 있은 후 겨울에 진행하는 사역이다.
뿌리기 사역은 8월 둘째 주 한 주간 농촌(교회가 없거나, 있어도 상대적으로 약한 곳)에 내려가서
어르신들을 만나서 예절로 다가가 마음의 문을 열고 열려진 마음에 복음을 심고,
어린이들에게도 역시 사랑으로 다가가서 예수님을 소개하는 소위 농촌 전도 프로그램이다.
그 후 그 때 만났던 아이들과 편지를 6개월 정도 주고받은 후 이듬해 2월에 그 아이들을 서울로 초청해
3박4일 동안 선생님과 일대일로 함께 지내며 서울 구경(남산, 국회, 방송국 등)을 하면서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다(참고 www.hanshi.or.kr).
나는 95년부터 이 사역에 함께 하고 있다.

오랜만에 선발대로 가게 되어서 좀 얼떨떨해서 운전이나 잘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갔다.
하지만 열두 명 정도가 내려왔는데 상황 상 세 조로 나누어 넓은 지역에서 아이들을 찾아 모아야 했기에
직접 어른들을 만나고 아이들을 만나서 설득하고 이튿날에는 데리고 오는 일을 해야 했다.

서울로 출발하는 날 오전에 전날 오후에 갔었던 집에 아이들을 데리러 갔다.
할머니가 세 명의 손녀를 키우고 있는 집이었다.
여덟 살, 일곱 살, 여섯 살 먹은 여자 아이들이 마당에서 놀고 있었다.
할머니는 잠깐 밖에 나가셨는지 아이들만 있었다.
전날 할머니는 반신반의하면서 보내야 하는지 반복해서 반문하셨고 거의 우격다짐으로 보내시는 줄 알고 내일 오겠다고 약속을 받아 놓은 상태였다.
아이들은 전혀 갈 준비를 하고 있지 않았고 마당에 만들어진 비닐하우스 안에서 소꿉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곱 살 먹은 둘째는 마당 한 켠에서 막 볼일을 마치고 바지를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는 삽을 가지고 오더니 어설프게 치우는 것이 아닌가.
순간 어떻게 아이가 저런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고 있을까 싶었다.
다른 아이들 같으면 엄마가 깨끗한 화장실이나 변기통을 사용하도록 하고,
배변 후에는 티슈로 닦아 주고 변 처리는 부모들이 할 텐데
이 아이는 스스로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으니.
글로 쓰려니 그 상황이 잘 그려지지 않지만
아무튼 충격적인 모습에 놀랐고,
사실은 내가 불쾌감을 느끼고 있다는 데서 더 놀랐다.
배변 후 제대로 처리도 하지 않고 바지를 치켜 올리는 모습에서였는지,
아니면 삽에 뭉개지는 똥을 보고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이 아이들을 데리고 가야 하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고,
반대로 ‘그러니까 이 아이를 꼭 데리고 가야겠다’는 생각도 강하게 들었다.
뒤늦게 들어오신 할머니는 안보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찾아 왔느냐 시면서도
아이들을 보느라 지치셔서 좀 떨어져 있고 싶다는 소망의 눈빛으로
못이기는 척 아이들의 옷을 갈아입히시고는 흔쾌히 보내 주셨다.
항상 그렇지만 부모들이 걱정하는 것처럼 아이들이 오줌을 싼다든지 집에 가고 싶다고 떼를 쓰는 일은 없었다.
왜냐면 선생님들이 3박4일의 기간만큼은 부모보다는 못하더라도 정말 헌신적으로 잘 해 주기 때문이다.
이 아이들도 시골에서의 모습이 어떠했느냐 와는 전혀 상관없이
짝꿍 선생님과 정말 기막힌 3박4일의 기간을 보냈다.
아마 지금쯤 꿈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3박4일의 일정을 꼬박 좇아 다니는 것이 정말 쉽지 않은 일이지만
아마도 함께한 그 아이들에겐 평생 잊을 수 없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사역자들이야 시간이 지나면 잊어 가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나에겐 아직 그 마당에서 일곱 살 먹은 아이의 행동이 지워지지 않는다.
그렇게 부모에게서 떨어져서 어른들의 무관심 속에서 자라는 많은 아이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매주일 내가 만나고 있는 나의 아이들...

20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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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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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에 들어서면서 두 분이 별세하셨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한 분은 대학 동기의 어머님이셨고, 다른 한 분은 예전에 있던 교회 선생님의 아버님이셨다.
친구의 어머님은 뵌 지 오래 되었지만 연세가 많지 않으시다는 것을 알기에 놀랐고,
선생님의 아버님은 지난주에 잠시 교회에 들렀을 때 먼발치에서 뵈었는데 별세하셨다고 해서 놀랐다.
그 때는 예전에 뵈었던 모습 그대로였는데 그렇게 갑자기 가실 수 있는가 싶었다.
그러니 가족들이야 얼마나 놀라고 슬픔이 클까.
문상을 가서 알았지만 친구 어머니도 갑자기 별세하신 것이란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을 당한 친구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래,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 중에 죽음을 예상하고 준비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리고 그의 가족들 역시 말이다.

죽음은 언제나 예고 없이 찾아온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은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심지어 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죽음보다는 삶을 더 그린다.
그래서 사람들은 삶을 정리하는데 있어서 미숙하다.
마치 영원히 살기라고 할 듯 이런 저런 감정들을 쌓아 놓고 산다.
죽음이 이르렀을 때 죽음에게, 남아 있는 자들에게 할 말도 미처 준비하지 못한 채.
예외적인 경우도 있겠지만...

그래서 내가 오늘 살아 있기 때문에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를 중심으로 돌고 있는 세상이 내가 없어도 전혀 이상 없이 움직일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고,
그러하기에 나에게 주어진 하루하루의 귀함을 알고
그 시간들을 소중하게 기억 속에 남겨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죽음을 준비하는 삶일 것이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시간에 끝을 생각할 수 있다면 함부로 살진 않을 것이다.
이름 하여 ‘인생의 끝에 서서 오늘을 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기치 않은 죽음, 급작스런 생의 마감은 없다.
이미 다 준비가 되어 있었으니까.
관계적 측면은 말할 것도 없고, 물질 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감정적 부분과 영적인 부분까지도.

자 이제 만나는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만나는 것처럼 정성을 다하고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오늘을 소중히 여기며 성실히 살아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누구도 소홀히 대할 수 없고, 일 분 일 초도 그냥 흘려보낼 수 없다.

2006.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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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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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에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야 산다’라는 책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목을 끌었던 때가 있었다.
내용을 살펴보지는 않았지만 설득력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뭔가 의구심이 드는 제목이라고 생각했었다.
그 후에 ‘저주’라는 표현에 대해 과연 성경적인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책이 나왔던 것으로도 기억한다.

과연 가계에 저주가 흐르고 있을까?
어쩌면 우리는 이미 첫 사람들로 인한 저주가 아닌 심판으로 이 땅에서 갖은 고통을 받으며 살고 있지 않은가.
그 문제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고, 저주까지는 아니지만 뭔가 있다는 생각은 드는 것이 사실이다.
분명 부모 세대를 통해 자녀 세대로 전해지는 뭔가가 있다.

그 뭔가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았는데 결론은 세계관에 있었다.
부모가 가진 세계관이 자녀에게 고스란히 전해져 영향을 주는 것 같다.
세계관이라고 하니까 좀 거리감이 느껴지는데, 어쩌면 세상에 대한 태도라고 할 수 있겠다.
부모의 부정적인 태도, 원망하는 태도 등은 자녀들의 마음에 뿌려져 싹을 틔운다.
한국적으로 표현하면 부모의 한이 자녀에게 전해진다고 할 수도 있겠다.
유전적으로 전해진다고 하는 연구도 있다고 하지만
꼭 유전자에 뭐가 있다고 보지 않더라도
우리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알고 있다.
부정적인 세계관을 가진 부모에게서 자란 자녀는 당연히 부정적 세계관을 가질 수밖에 없다.
반면 긍정적이고 평화로운 세계관을 가진 부모에게서 자란 자녀는 또 그런 세계관을 갖게 될 수밖에 없다.
조급하고, 인내심이 적고, 공격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하는 것들이 대개 그런 연유를 가진다.

그래서 만약 끊어야 할 것이 있다면 저주가 아니라 부모로부터의 이어지는 정서적 끈이다.
부모의 세계관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새로운 세계관의 지평을 넓혀 가야한다.
그래야 자신뿐만 아니라 이후 세대가 세계를 긍정적으로 보게 될 것이다.
이 과제는 현재 부모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본인에게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변화의 시작점은 바로 내가 온전한 자리를 찾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남편으로, 아버지로, 아내로, 엄마로서의 바른 자리를 고민하고 찾아 가야 한다.
사실 자녀들에게 부정적 세계관이 이어지는 주된 원인은 부모 세대의 불화, 즉 역기능적 가정사로부터 기인한다.

그런데 만약 저주나 심지어 귀신에 의해 가계에 악한 기운이 이어진다고 한다면
또다시 자신이 아닌 제 3의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하게 된다.
그리곤 저주를 유발한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귀신을 축출하기 위한 특별한 모임들에 시간을 들이게 될 것이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면 정작 자신의 가정은 또다시 갈등 투성이가 되어 버릴 것이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남 탓하는 모습은 없어져야 한다.
문제의 핵심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고,
오늘 나의 바른 위치를 찾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가장 최우선이요 최선이다.


2006.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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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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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으로

깨어살리/돌소리 2006. 10. 26. 21:14
요즘에는 농한기라서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농민들이 특별한 일이 없다.
뭔가 해보려는 젊은 사람들 몇몇을 제외하면...
그래서 연세 드신 분들은 대개 마을 회관에 모여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일상이다.
나야 농번기에도 그리 바쁘지 않았지만,
요즘 같은 때에는 더더욱 집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연탄재를 처리하는 일이나, 물 받는 일을 제외하면
거의 집 안에서 책을 읽고, 쓰는 일을 하거나 컴퓨터 앞에 앉아서 보낸다.
그래서인지 때때로 방 안에 있을 때 여기가 농촌인지 도시인지도 무감각해진다.
그러다가 친구 집에라도 가려고 자전거를 타고 집을 나서서 시골길을 달리다 보면
아! 하는 탄성과 함께 여기가 시골이구나, 내가 지금 이 곳에 있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푸르름은 자취를 감춰버렸지만 넓게 펼쳐진 논과 포도밭, 그리고 멀리 바라다 보이는 높고 낮은 산 봉오리들...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해 휴식을 취하고 있지만 그 안엔 무한한 에너지가 숨겨져 있을 것이다.
그래, 안에만 있으면 안 된다. 안에만 있으면 내가 어디에 있는지 잊게 될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나의 존재조차 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나의 존재를 먼 곳에 있는 어떤 것과의 연관에서 찾으려고 한다면 그보다 큰 오류는 없을 것이다.
바로 내가 딛고 서 있는 땅, 호흡하는 공기, 마시는 물이 바로 나를 나 되게 하는 것이 아닐까.
내가 흙이고, 물이고, 공기이니...

겨울에 내리는 비가 대지를 촉촉이 적시는 오늘.
긴 갈증을 풀며 부르는 대지의 노래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때
나의 작은 외침 또한 누군가 귀 기울여 주리라.

2006.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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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놈

깨어살리/돌소리 2006. 10. 26. 21:14
집에 수도가 얼어서 궁여지책으로 계량기에서 선을 빼 물을 받아 사용하고 있다.
당연히 난방은 되고 있지만 온수는 나오지 않기 때문에 솥에다가 데워서 사용한다.
그러다보니 충분히 더운 물을 사용하지 못해 낮은 온도의 욕실에서 움츠리고 씻어야 한다.
나야 괜찮지만 어머니는 좀 곤란하신가 보다.
그래서 큰맘 먹고 목욕탕에 가기로 했다.

상주 시내나 김천 시내나 거리가 비슷하나 좀 더 나을 것 같은 김천으로 가게 되었다.
지나가다가 보아둔 곳이 있어서 차를 주차하고 들어가려고 하는데,
왠지 잘못 온 것 같기도 하고 영 어색했다.
승용차들 사이에 먼지투성이 화물차를 댈 때부터,
잘 차려 입은 사람들이 오가는 문으로 들어서야 하는 것 까지 느낌이 좀 이상했다.
집에 있을 때는 전혀 이상하지 않았는데,
어머니나 내 차림새가 완전히 그 곳 사람들하고 이질적으로 보였다.
이름 하여 '촌티 풀풀'이었다.
따듯하게 입은 솜바지 하며 언밸런스한 잠바에 먼지투성이 신발에...
더구나 밖에는 사우나라고 되어 있는데 안에는 사우나의 ‘사’자도 찾을 수 없으니.
간판에 있는 전화번호를 찾아 걸어 보았더니 영업은 안 한지 좀 되었단다.
서둘러 사거리 반대편 멀리에 있는 '사우나' 간판을 발견하고는 그리로 옮겨갔다.
결국 목적한 '목욕'을 할 수는 있었다.

물론 촌놈이라서 헤맨 것이 아니라 초행이라서 그런 것이지만,
스스로 그런 분위기에서 위축되어버리는 것도 우습고,
반면 나에게서 촌사람이 느껴진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뭐 서울에 살 때도 변두리에 산다는 의미로 서울촌놈이라고 하긴 했지만.
하긴 약간 촌스럽게 사는 것이 건강한 삶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20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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