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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에 대한 소개는 단 하나다. 그는 갈릴리 나사렛 출신이다.
그 이상 부연하거나 추가적 사건이 있을 필요는 없다.
요한복음에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조롱받았던 곳!
뭐 다윗의 자손이어야 한다는 끼워 맞추기식 논리도 필요 없다.
성령에 의해 잉태되었다는 것을 굳이 힘들여 풀어 놓을 필요도 없다.
아직 유아일 때 이집트 구경을 했다는 것도.
얼토당토하지 않은 동방의 박사들과 목자들까지 끌어들일 필요도 없다.
그저 예수는 갈릴리 나사렛에서 온 사람이고,
그가 처음 드러난 것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면서부터다.

아마 요한도 처음에는 그가 자신이 얘기한 사람인지 몰랐을지 모른다.
시간이 지나면서 차차 예수의 정체가 밝혀졌을 것이다.
하늘로서 들리는 소리 역시 예수님만 듣는다.
얼마나 감격적인 자기 확신인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것! 기뻐하는 아들이라는 것!

어쩌면 모든 인류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는 것은 동일할 거다.
그러나 모두를 기뻐하지는 않으실 것이다.
당신께서 선택하신 유대인들조차 기뻐하시긴 어려워 보인다.
예수님께서 기뻐하는 아들이라는 것이 그분의 삶 전체를 분명하게 해준다.
예수님의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라는 사실은 예수님의 삶이 어떠할지 알 수 있다는 얘기다.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살아낸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를 얼마나 무겁게 받으셨을까.
매일의 삶이 십자가를 지는 삶이었고,
결국 십자가가 현실이 되는 상황 가운데서도 물러 서거나 피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아들이었고(존재),
더불어 예수님의 삶이 하나님을 기쁘게 했다(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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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들에게 설교할 때, 우리는 작은 예수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작은 예수가 될 때 우리들이 살아가는 곳들이 사랑과 평화가 넘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작은 예수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몸으로 보여주는 삶이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전하셨던 가치를 사람들에게 전하고 깨우친 사람들에게,
교회가 성도들에게 바라던 그런 삶을 살아낸 사람들에게
예수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을 불경한 것으로 여기고 비판한다.
어떻게 그 사람에게 감히 예수라고 할 수 있느냐고 분개하기까지 한다.
아마 그들은 스스로의 논리적 모순에 빠진 것이다.
자신들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것에 대한 질투심이 엿보이기도 한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삶을 살았다.
우리 나라의 예만 들어도 최용신, 주기철, 손양원 등의 선각자들을 예수라 하는데 이의는 없을 것이다.
또한 류영모, 김교신, 함석헌, 권정생과 같은 이들도 역시 그렇다.
더 나아간다면 암울한 시기에 자신을 태워 세상을 깨우려고 했던 전태일,
또 최근에 노무현 대통령까지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아니면 최소한 예수님을 닮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정확히 한다면 그들을 그리스도라 칭할 수는 없겠지만 (작은) 예수라고 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속한 곳에서 자신을 가장 밑바닦으로 집어 넣으며
기꺼이 자신을 태우며 부르짖을 수 있는 삶,
너무도 이기적인 삶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다른 존재를 깨닫게 하는 삶,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그 길을 하나님께 기대어 가는 삶을 살아간다면
그 누가 그를 예수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럼에도 그 예수라고 칭할 사람들을 생각하면 슬픔이 더 눈 앞을 가린다.
좀 더 자신을 위해 사시지, 좀 더 이기적이 되셨으면 좋았을 것을.
어쩌면 이 말은 베드로의 말과 닮아 있다.
'당신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라고 부르짖던.
그러나 그들에게 그 길은 운명이 아닌 선택으로 주어졌다.
그리고 그들을 그 길을 선택하고 살아갔다.
그래서 결국 운명은 그들을 예수라 하는 것이다.

남아 있는 자들은 자신의 비겁했음을 가슴을 치며 후회하거나
그의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 것을 시샘하며 불평을 늘어 놓는다.
기득권자들은 예수가 많아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때문에 자신들의 삶의 내용들이 들춰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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