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 길이 열리다.

레 6장

2 누구든지 여호와께 신실하지 못하여 범죄하되 곧 이웃이 맡긴 물건이나 전당물을 속이거나 도둑질하거나 착취하고도 사실을 부인하거나

3 남의 잃은 물건을 줍고도 사실을 부인하여 거짓 맹세하는 등 사람이 이 모든 일 중의 하나라도 행하여 범죄하면


속건제 레 5:14-6:7

속건제와 속죄제가 많이 혼동이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쉽게 생각하면 속건제가 속죄제의 큰 울타리 안에 들어 있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속죄제나 속건제나 하나님의 계명을 부지중에 범하였을 때에 드리는 것이라고 되어 있는데

차이는 속건제에서는 하나님의 계명 중에서도 하나님과 관계된 부분에 대해서 더 강조점을 두고 있습니다.

“이는 속건제니 그가 여호와 앞에 참으로 잘못을 저질렀음이니라”(5:19)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또 속죄제는 기타 항목에서도 ‘깨달았을 때’라는 표현을 통해 대개 자신도 모르고 지은 죄들을 다루는데,

속건제는 속이고, 부인하고, 거짓 맹세하는 등 고의적인 측면이 더 강하고,

더 중요한 것은 위의 과정을 통해 이웃에게 심각한 손해나 피해를 주었을 때 드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죄제는 자복하는 과정을 거쳐 제물을 가져오면 되는 반면

속건제는 일단 손해를 입힌 사람에게 보상을 하고, 제사를 추가적으로 드려야 했습니다.

아마 당시에도 속죄제를 드려야 하느냐 속건제를 드려야 하느냐를 놓고 옥신각신 하기도 하고,

속죄제를 드렸느냐 속건제를 드렸느냐를 가지고 사람들의 시선도 나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제사의 의미는 명백해 집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사를 요구하시는 것은

그들을 괴롭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살리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들이 잘못을 하고 그 죄로 말미암아 죽지 않도록,

더 큰 어려움을 당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죄라는 표현은 명확한 기준이 있을 때 성립되는 것이지

사람들에게만 맡겨 두었을 때는 역학 관계에 따라 무시될 수 있는 소지가 있습니다.

강자들은 제멋대로 행동해도 죄가 되지 않고,

약자는 상대적 차별과 부당한 질서 속에서 한을 쌓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들은 공동체의 수면 아래 잠복하고 있다가 뿌리로부터 썩어 들어가게 해서 넘어지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속죄제와 속건제라는 이름으로 해소책을 주신 것입니다.

거룩한 백성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어느 누구든 차별이 없고

정당한 대접을 받는다는 것을 뜻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특히 속죄제의 경우 지도자들에는 엄격한 수준을 요구하셨지만

일반 백성들에게는 다양한 수준을 제시하시며 형편에 맞추어 하나님 앞에 나아오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사는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이렇게 활짝 열어 주신 길을 제대로 걷지 않았습니다.

제사를 무시하고 동시에 하나님을 무시했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들의 이런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대속의 사건이 일어났고,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그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살 길도 이런 살 길이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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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사람들

레5

7 만일 그의 힘이 어린 양을 바치는 데에 미치지 못하면 그가 지은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여호와께로 가져가되 하나는 속죄제물을 삼고 하나는 번제물을 삼아


가난한 자들의 속죄제물

힘이 흠 없는 암염소, 흠 없는 어린 암양에 미치지 못할 때,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

힘이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에 미치지 못할 때 또는 고운 가루 십분의 일 에바



하나님은 백성들의 형편을 고려하셔서 힘이 미치지 못할 때는 덜 부담이 되는 제물을 바치도록 배려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속죄제를 삶 가운데 자연스럽게 여기기를 바라셨기 때문에

제사를 지내는 일이 부담이 되지 않게 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거룩한 백성이 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마음과도 닿아 있습니다.

다른 제사는 상황에 따라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지만

속죄제는 허물이 생겼을 때에는 누구나 언제든 드려야 하기 때문에

그 문턱을 낮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거룩한 백성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늘 스스로를 돌아보고 정화하는 의식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역시 거룩한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돌아보는 과정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의 현실은 그렇지 않은 듯합니다.

교회는 대부분 성도들의 지친 몸과 마음의 쉼과 위안에 초점을 맞추어져 있고,

조금 낫다고 하는 교회가 봉사와 선교를 강조하는 교회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거룩해 지기 위한 자기반성을 위한 절차를 교회 안에 담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죄를 사함 받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세상 가운데서 끊임없이 범죄하고 허물투성이가 될 수밖에 없는데

타당한 절차를 통해 자복하고 용서함을 받을 수 있는 채널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요즘 교회 안에는 자칭 의인들로 가득합니다.

구조적으로 그것을 고착화 하고 권장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것을 명심하고, 스스로 돌아보아 거짓된 삶을 자복하고 통회하는 예배를 드리며

스스로의 한계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하심을 경험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때

그는 진정 거룩한 그리스도인으로 한 걸음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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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지는 그리스도인

레4

3 만일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이 범죄하여 백성의 허물이 되었으면 그가 범한 죄로 말미암아 흠 없는 수송아지로 속죄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릴지니


속죄제(4:1-5:13)

속죄제에서 먼저 고려되는 것은 죄 지은 자가 누구냐였습니다.

범죄한 자가 누구냐에 따라서 제물이 되는 짐승과 제사 방식이 달라졌습니다.

특기할 만한 것은 제사장이 가장 먼저 언급되고 그 다음이 회중, 족장, 평민의 순으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사장의 자리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신 것이 분명한데,

이는 온 회중보다도 그 책임이 막중하다는 뜻이기도 하고, 또 제사장을 소중히 여기시며 관심 갖고 보신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제사장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권한, 혜택들을 누리며 함부로 행하지 못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한발 앞서서 하나님의 뜻을 더 반듯하게 실천할 책임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관심과 배려에 대한 정당한 응답이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그 제사장으로서 당신의 역할을 누구보다도 충실히 감당하셨습니다.

문제는 예수님의 그 제사장의 소임이 고스란히 오늘의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계승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나와 하나님 사이에 더 이상 중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을 변론하신다고는 하지만

이 땅에서의 삶에 대한 온전한 제사장의 직임은 누구도 아닌 나에게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 행동에 대한 책임이 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나의 제사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이 하나님의 시선 가장 가까이에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때로 어떤 목회자는 자신을 제사장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성도들은 또 목회자들이 제사장이고, 그래서 목회자의 기도는 특별한 힘이 있다고도 생각하기도 합니다.

물론 여러 사람들 앞에서 더 큰 책임을 맡았다는 것으로 특별한 자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앞의 생각은 예수님 이후 그리스도교를 근본적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책임질 수 없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고, 이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인의 삶이 곁길로 가도록한 것입니다.

자신들이 스스로 해결해 나갈 수 있는 일들을 다른 이(교역자)에게 돌리고 역시 무책임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인 모두는 레위기 4장의 맨 앞자리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가장 가까운 시선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부르셔서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대한 질문을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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