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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낭 도보여행 2 - 역사와 종교


콴인텡 사원, 관음사


관음보살을 모신 사원이라고 하는데, 어떤 것이 관음보살인지 도통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정신없는 사찰이다. 안으로 들어가면 한쪽은 기름 같은 것들이 더러운 통에 담겨 쌓여 있고, 흘려내려 찌들어 있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고, 다른 쪽도 정신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런 불결하고 무질서한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람들은 향을 하나 둘도 아니고 한 움큼씩 들고서 불을 붙여 흔들며 옮기느라 여념이 없다. 이런저런 잡다한 문화들이 혼합된 혼합불교라고 해야할까. 신심이 느껴지지 보다는 의아함이 느껴질 뿐이다.


스리 미리암만 사원


힌두교 사원은 형형색색으로 치장되어 언듯보고서 (좀 생뚱맞지만) 유치원같다는 생각을 했다. 또 하나의 특징은 신발을 벗고 들어가긴 하지만 들어가고 나오는 데 있어서 정말 마음이 편했다. 힌두교 자체가 모든 것을 흡수한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특별한 경계심을 갖지 않는 분위기였다. 사제인지 신도인지 웃통을 벗은 전통의상을 입은 사람이 손짓으로 따라오라고 해서 갔더니, 파라핀 조각으로 불을 피우고 하얀재를 내 이마에 바르고는 돈을 내라고 했다. 그래서 1링깃을 줬더니 오케이 하면서 사라졌다. 

어쩌면 이렇게도 상상력이 풍부할까? 앙코르 와트에 대해 공부를 하면서 조금 봤다고 몇 가지 그림이나 부조들이 뭔지도 알겠는데, 정말 다양한 신들과 이야기들을 생산해 낸 인도사람들의 종교성에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었다.


카피탄 클링 모스크


1801년에 세워졌다고 하니, 이 역시 2세기가 넘은 사원이다. 이름의 유래나 페낭에서 그 위치에 대해 전이해를 갖고 갔는데, 그 규모나 분위기에 약간은 김이 빠졌다. 일단 더운 나라의 모스크여서 정면을 제외한 세 방향이 모두 오픈되어 있어서 집중도가 떨어지는 것이 가장 크게 다가왔다. 카자흐스탄의 모스크에서 느꼈던 그 경건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아무래도 카자흐스탄은 추운 나라라서 사방을 막아 어두운 채광으로 자연스럽게 엄숙한 분위기가 만들었던 것 같다. 모스크에 들어가며 저절로 기도가 나올 것 같은 분위기를 기대했는데, 그렇지 않았서 그랬고, 덧입은 옷에서 냄새가 많이 나서 또한 비호감이었던 것 같다. 


쿠콩시/ 입장료 10링깃



원래 순서상으로 얍콩시를 먼저 갔어야 하는데, 길을 잘못 들어서 쿠콩시를 먼저 가게 되었다. 중국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 가문의 결속을 다지고 외부로 힘을 드러내기 위한 의도로 만들어진 개인적 사원이다. 가문의 조상들을 모시고, 그 조상을 신격화해 신앙화의 단계로 끌어올린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단지 일년에 한두번 상을 차리고 제사지내는 정도가 아닌 아예 사원을 만들어서 가문의 내부 뿐만 아니라 외부로까지 견고한 터를 다지는 매개체가 된 것이다. 가족이라는 것이 종교가 되고, 다시 권력을 공유하고, 또 재산을 유지하고 늘려가는 공동운명체로 발전해 간 것이다. 

그들을 존재하게 하는 것은 과거의 조상들일까, 아니면 그 조상들을 중심으로 모이는 오늘의 구성원들일까. 조상의 가장 가까이에 있으며 또 그들의 유지를 대변한다고 하는 이들로 인해 조상은 힘을 쓰게 될 것이다. 


쑨얏센 박물관


처음엔 쑨얏센이라는 이름이 생소해서 지나쳐 갔다가, 그 이름이 우리 식으로 쑨원이라는 것을 알고는 다시 방문했다. 중국의 청나라의 간판을 내린 장본인이 아닌가. 바로 이 곳 페낭에서 그런 대업을 이루는 기반을 다졌다니 감격의 현장이었다. 원래는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서 깊숙한 곳까지 보고 나오는 곳인데, 입구에 아무도 없어서 로비에서 조금 더 들어가 뚤린 천정으로 하늘이 보이는 정원에서 돌아 나왔다. 꼭 내부를 꼼꼼하게 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쑨원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한 번 더 생각해 보았다는 것에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 아닌가. 우리 나라 독립운동가들도 중국이나 러시아에서 활동을 했는데, 이렇게 잘 보존하고 관리되었으면 좋겠다.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에 여러 곳이 방치되고 있는 것을 보고 많이 실망했었던 것이 기억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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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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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낭 도보여행 1 - 역사와 종교

2013.5.1.

가이드북이 제안하는 페낭 조지타운 도보여행을 그대로 따라가보았다. 콘 윌리스 요새 - 퀸 빅토이라 시계탑 -  세인트 조지 교회 - 페낭 박물관 - 콴인텡 사원 - 스리 미이람만 사원 - 카피탄 클링 모스크 - 얍 콩시 - 쑨얏센 박물관 - 쿠 콩시. 만만치 않은 코스지만 오전에 완주하고 얍 콩시 근처에 있는 로컬식당에서 점심을 먹을 생각으로 발걸음을 제촉했다.

일단 이 코스의 특징은 역사성에 다양성이 더해진 점이다. 역사성은 페낭이 어떻게 세계 역사 가운데 주목을 받고 지금의 모습으로 발전해 왔는지 다양한 역사 유적들을 통해, 다양성은 불교, 힌두교, 기독교(성공회, 가톨릭), 이슬람교, 조상숭배(?) 등 여러 종교의 사원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콘 윌리스 요새/ 입장료 2링깃


그 옛날 그 먼 곳 유럽의 열강들이 이 곳까지 와서 힘자랑을 했다는 것이 참 놀랍다. 남아프리카를 돌아서 오는 항해길도 만만치 않았겠다. 남의 땅의 좋은 곳들을 차지하고 1세기 이상 주인행세를 하고서도 자신들이 신사라 하고, 세계의 평화와 질서 운운하는 말들이 정말 가소롭게 느껴진다. 오늘날엔 그들의 흔적이 또 하나의 문화유산이 되고 외화벌이의 효자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는 것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한국도 일본인들이 지었던 건물들을 더 많이 보존했다면 세계문화유산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을까. 만약 일본이 아니고 서구의 어떤 나라였으면 상황이 좀 달랐을 지도 모르겠다. 우리 민족 정서 속에 깔린 사대주의가 일본에게는 반대로 작용하는 것 같다. 물론 일본문화가 남아 있고 향수를 가지고 있는 이들도 있고, 그 때로부터 청산되지 않은 인적, 물적 문제들은 있지만...


퀸 빅토리아 시계탑

소개 책자에는 이 시계탐이 페낭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건축물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 보면 왜 이것이 그렇게 유명할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별로 눈길을 끌지 못한다. 그냥 하얀색의 시계탑인데 뭐가 특별한 건진 잘 모르겠다. 한 중국인 거부가 빅토리아여왕에게 헌정한 것이고, 또 여왕이 행차를 하려다가 불발되었다는 사실 때문일까.

생각해 보면 그 옛날(1897년 완공) 거의 이층 건물이 주를 이루고, 관공서가 3,4층 일 때 이 시계탑은 충분히 페낭의 랜드마크가 될 수 있었을 것도 같다. 그래서 이 시계탑을 중심으로 수많은 이야기들이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내일 시계탑 앞에서 보자'라든가, '당신을 향한 사랑은 저 시계탑처럼 변치 않을 거야'라든가, 페낭의 사람들에게 시계탑은 삶의 중심에 있었을 수도 있었으리라.

한가지 아쉬움은 시계탑이 있는 거리 맞은 편에 너무도 큰 건물이 들어서 있는 것이다. 안그래도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작은 시계탑이 더 작아 보이게 만들었다. 행정을 하는 사람들이 조금만 신경을 썼으면 이런 불상사는 막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이런 경우들 종종있다. 사실 한국에는 이런 일이 더 많지 않은가. 


시청


세인트 조지 교회(영국 성공회)

1818년에 지어진 성공회 교회이다. 내부를 볼 수 있는 시간이라고 해서 갔는데, 미사가 끝나지 않아서 들어가지 못했다. 겉에서 정말 넓은 정원과 하얀 외관을 감격스러운 시선을 보는 것으로도 사실은 충분히 감명을 받았다. 재미있는 것은 여기서도 '알파 코스'를 하는 것이다. 맞다. 알파코스는 영국 성공회에서 만든 것이니, 오히려 한국 개신교에서 하고 있는 것이 더 놀라운 일이라 해야겠다. 

지금 이 교회가 페낭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역사적 유물과 소수의 신자들의 예배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 같다. 그러나 처음 이 교회가 세워진 2세기 전의 상황은 어땠을까. 사실 콘 윌리스 요새에도 작은 예배당이 있었다. 내부는 텅 비어있었고, 전혀 관리되고 있지 않는 모습이었다. 마찬가지로 그 교회나 이 교회나 영국이 페낭을 지배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은 같은 것이기에 둘을 보면서 같은 의문을 제기할 수 있겠다. 서구열강의 제국주의와 기독교는 어떤 관계였을까. 역사적인 자료를 보면 선교사가 먼저가서 희생을 당했을 때 그것을 명분으로 군대가 들어왔고, 군대가 들어오면 그 뒤를 따라 또 선교사가 들어오기도 했다. 

종교, 특히 기독교는 사랑과 평화를 말하지만 과정은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약자들을 죽이고, 지배하는 과정에 힘을 주고 정당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지배자의 종교로서 피지배자들을 개종시키는 과정이 뒤따랐다.


페낭 박물관/ 입장료 1링깃


영국이 지배하기 전에는 페낭의 역사가 없었던듯하다. 그 때부터 페낭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역사적 자료들은 꽤 자세하게 남아있는데, 그 전의 것은 전시되어 있지 않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첫번째 방에서 보여주고 있는 말레이시아, 특히 페낭을 구성하는 인종이다. 지금의 인도네시아 쪽에서 건너온 말레이 인종, 중국에서 이주해 온 중국 인종, 인도에서 건너온 인도 인종이 주를 이루고, 아르메니안, 타이, 다양한 혼혈 인종들에 심지어 일본까지 정말 다양한 인종이 함께 어우러져 살고 있는 곳이 말레이시아이다. 길을 걸을 때도 인도사람, 중국사람, 아랍사람, 태국사람, 서양사람 등 다양한 사람을 보게 된다. 그들이 모두 말레이시아 사람들이다. 

관광지를 다닐 때도 그들이 하는 말을 가까이서 듣지 않으면 현지인인지 관광객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그 다양한 인종 가운데서도 단연 두각을 나타낸 인종이 중국사람들이고 그들의 자취가 박물관에 고스란히 남겨져 있었다. 그들이 살던 주거 형태나 가제도구들이 그대로 복원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면 화인들을 정착하지 못하게 했던 한국인의 배타성은 세계 최고 수준인 것 같다.


패리나칸 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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