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낭 도보여행 1 - 역사와 종교

2013.5.1.

가이드북이 제안하는 페낭 조지타운 도보여행을 그대로 따라가보았다. 콘 윌리스 요새 - 퀸 빅토이라 시계탑 -  세인트 조지 교회 - 페낭 박물관 - 콴인텡 사원 - 스리 미이람만 사원 - 카피탄 클링 모스크 - 얍 콩시 - 쑨얏센 박물관 - 쿠 콩시. 만만치 않은 코스지만 오전에 완주하고 얍 콩시 근처에 있는 로컬식당에서 점심을 먹을 생각으로 발걸음을 제촉했다.

일단 이 코스의 특징은 역사성에 다양성이 더해진 점이다. 역사성은 페낭이 어떻게 세계 역사 가운데 주목을 받고 지금의 모습으로 발전해 왔는지 다양한 역사 유적들을 통해, 다양성은 불교, 힌두교, 기독교(성공회, 가톨릭), 이슬람교, 조상숭배(?) 등 여러 종교의 사원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콘 윌리스 요새/ 입장료 2링깃


그 옛날 그 먼 곳 유럽의 열강들이 이 곳까지 와서 힘자랑을 했다는 것이 참 놀랍다. 남아프리카를 돌아서 오는 항해길도 만만치 않았겠다. 남의 땅의 좋은 곳들을 차지하고 1세기 이상 주인행세를 하고서도 자신들이 신사라 하고, 세계의 평화와 질서 운운하는 말들이 정말 가소롭게 느껴진다. 오늘날엔 그들의 흔적이 또 하나의 문화유산이 되고 외화벌이의 효자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는 것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한국도 일본인들이 지었던 건물들을 더 많이 보존했다면 세계문화유산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을까. 만약 일본이 아니고 서구의 어떤 나라였으면 상황이 좀 달랐을 지도 모르겠다. 우리 민족 정서 속에 깔린 사대주의가 일본에게는 반대로 작용하는 것 같다. 물론 일본문화가 남아 있고 향수를 가지고 있는 이들도 있고, 그 때로부터 청산되지 않은 인적, 물적 문제들은 있지만...


퀸 빅토리아 시계탑

소개 책자에는 이 시계탐이 페낭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건축물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 보면 왜 이것이 그렇게 유명할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별로 눈길을 끌지 못한다. 그냥 하얀색의 시계탑인데 뭐가 특별한 건진 잘 모르겠다. 한 중국인 거부가 빅토리아여왕에게 헌정한 것이고, 또 여왕이 행차를 하려다가 불발되었다는 사실 때문일까.

생각해 보면 그 옛날(1897년 완공) 거의 이층 건물이 주를 이루고, 관공서가 3,4층 일 때 이 시계탑은 충분히 페낭의 랜드마크가 될 수 있었을 것도 같다. 그래서 이 시계탑을 중심으로 수많은 이야기들이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내일 시계탑 앞에서 보자'라든가, '당신을 향한 사랑은 저 시계탑처럼 변치 않을 거야'라든가, 페낭의 사람들에게 시계탑은 삶의 중심에 있었을 수도 있었으리라.

한가지 아쉬움은 시계탑이 있는 거리 맞은 편에 너무도 큰 건물이 들어서 있는 것이다. 안그래도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작은 시계탑이 더 작아 보이게 만들었다. 행정을 하는 사람들이 조금만 신경을 썼으면 이런 불상사는 막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이런 경우들 종종있다. 사실 한국에는 이런 일이 더 많지 않은가. 


시청


세인트 조지 교회(영국 성공회)

1818년에 지어진 성공회 교회이다. 내부를 볼 수 있는 시간이라고 해서 갔는데, 미사가 끝나지 않아서 들어가지 못했다. 겉에서 정말 넓은 정원과 하얀 외관을 감격스러운 시선을 보는 것으로도 사실은 충분히 감명을 받았다. 재미있는 것은 여기서도 '알파 코스'를 하는 것이다. 맞다. 알파코스는 영국 성공회에서 만든 것이니, 오히려 한국 개신교에서 하고 있는 것이 더 놀라운 일이라 해야겠다. 

지금 이 교회가 페낭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역사적 유물과 소수의 신자들의 예배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 같다. 그러나 처음 이 교회가 세워진 2세기 전의 상황은 어땠을까. 사실 콘 윌리스 요새에도 작은 예배당이 있었다. 내부는 텅 비어있었고, 전혀 관리되고 있지 않는 모습이었다. 마찬가지로 그 교회나 이 교회나 영국이 페낭을 지배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은 같은 것이기에 둘을 보면서 같은 의문을 제기할 수 있겠다. 서구열강의 제국주의와 기독교는 어떤 관계였을까. 역사적인 자료를 보면 선교사가 먼저가서 희생을 당했을 때 그것을 명분으로 군대가 들어왔고, 군대가 들어오면 그 뒤를 따라 또 선교사가 들어오기도 했다. 

종교, 특히 기독교는 사랑과 평화를 말하지만 과정은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약자들을 죽이고, 지배하는 과정에 힘을 주고 정당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지배자의 종교로서 피지배자들을 개종시키는 과정이 뒤따랐다.


페낭 박물관/ 입장료 1링깃


영국이 지배하기 전에는 페낭의 역사가 없었던듯하다. 그 때부터 페낭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역사적 자료들은 꽤 자세하게 남아있는데, 그 전의 것은 전시되어 있지 않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첫번째 방에서 보여주고 있는 말레이시아, 특히 페낭을 구성하는 인종이다. 지금의 인도네시아 쪽에서 건너온 말레이 인종, 중국에서 이주해 온 중국 인종, 인도에서 건너온 인도 인종이 주를 이루고, 아르메니안, 타이, 다양한 혼혈 인종들에 심지어 일본까지 정말 다양한 인종이 함께 어우러져 살고 있는 곳이 말레이시아이다. 길을 걸을 때도 인도사람, 중국사람, 아랍사람, 태국사람, 서양사람 등 다양한 사람을 보게 된다. 그들이 모두 말레이시아 사람들이다. 

관광지를 다닐 때도 그들이 하는 말을 가까이서 듣지 않으면 현지인인지 관광객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그 다양한 인종 가운데서도 단연 두각을 나타낸 인종이 중국사람들이고 그들의 자취가 박물관에 고스란히 남겨져 있었다. 그들이 살던 주거 형태나 가제도구들이 그대로 복원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면 화인들을 정착하지 못하게 했던 한국인의 배타성은 세계 최고 수준인 것 같다.


패리나칸 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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