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다면,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더 분명하게 이야기 해 달라고 부탁한다면,
선택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 지 이미 매뉴얼로 제시되어 있다면
걱정할 것이 없을 것 같다.
특히나 사람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문제들 앞에서는 거의 속수무책이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너무도 다양하고,
그 감정이라는 것이 심하게 변화무쌍하기 때문이다.
어떤 원리나 구조를 세우기가 불가능해 보인다.
그래서 기다리는 것이 상책일 때도 있다.

내가 나름대로 정한 원칙은
일단 최선의 선택을 하고, 시간이 지나 결과가 좋으면 잘한 선택이고,
결과가 좋지 못하면 반성은 하되 후회는 하지 말자는 것이다.

바로는 선택의 기로에 서서는 최악의 선택을 계속하고 있다.
나름대로는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하겠지만,
후회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이다.
 

무시되는 현실들 

출9

27 바로가 사람을 보내어 모세와 아론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이번은 내가 범죄하였노라 여호와는 의로우시고 나와 나의 백성은 악하도다

28 여호와께 구하여 이 우렛소리와 우박을 그만 그치게 하라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다시는 머물지 아니하리라

29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내가 성에서 나가서 곧 내 손을 여호와를 향하여 펴리니 그리하면 우렛소리가 그치고 우박이 다시 있지 아니할지라 세상이 여호와께 속한 줄을 왕이 알리이다

30 그러나 왕과 왕의 신하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아직도 두려워하지 아니할 줄을 내가 아나이다


모세는 신이 아니었고 사람이었다.

그가 과거에 어떤 신분이었는지를 떠나 지금은 명백하게 이스라엘 사람이고,

80살의 초라한 행색의 노인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당시 신으로 자처하던 바로나,

그의 주변에서 호사를 누리던 그 어떤 권세가들이 가진 권위 그 이상이었다.

그들이 가졌다고 자랑하던 것이 아무 것도 아님을 너무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 중심에 있는 바로가 끝내 회피하려는 현실, 그 현실이 진실임을 깨달았어야 했다.

어쩌면 바로는 자신을 신으로 추앙하는 거짓 현실에 휩싸여

진짜 현실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눈앞에 생생히 펼쳐질 때도

금방 지나가 버릴 것이라고, 눈속임이라고 자신을 속이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한 명의 착각 때문에 많은 백성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는

또 하나의 현실이 무시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런 일들은 현재 교회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일부 목회자들이 교회 안에서 누리는 (조금 과장해서) 절대 권력이

사회에서도 동일하게 통할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제왕적으로 누리는 힘을 현실로 여기다가

교회 밖으로부터 들려오는 비판을 부당하다고 몰아붙이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목회자들의 태도가 너무도 이질적으로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왜 바로를 이야기 하면서 일부 목회자들의 모습이 떠오르는 지 가슴 아프다.

나도 그 목회자들의 무리 가운데 있는 것인데...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하는 능력을 배양해야 한다.

자신을 둘러싼 인의 장막에 휩싸여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면 안 된다.

바로가 그 현실을 무시하고 있을 때

애굽에는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일곱 번째의 재앙으로

각각 가축의 죽음, 악성종기, 우박이 내려진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고센에는 내리지 않았다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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