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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시간

깨어살리/돌소리 2006. 10. 16. 19:30
소리와 토리가 저녁을 먹고 나서 아직 날이 어두워지지 않았을 때,
둘은 자유 시간을 얻게 된다.
마음 놓고 뛰어다닐 수 있도록 풀어주는 것이다.

평소 얌전하기만 하던 소리는 얼마나 힘 있게 마당을 뛰어다니는지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토리는 소리를 쫓아다니면서 같이 놀자고 들러붙는다.
내 주변을 맴돌면서 번쩍 번쩍 뛰어 오를 때는 정신이 하나도 없을 정도다.
닭장 앞에도 가보고, 장독대 위에도 올라가 보고
짧게 주어지는 자유 시간을 만끽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처럼 보인다.

풀어놓고 키울 수도 있겠지만 소리는 이제 덩치도 있고
짖을 때는 처음 보는 사람들은 겁이 날 정도다.
그러니 나가서 무슨 사고라도 치면 안 되는 일이다.

개들은 묶여 있는 것이 더 이롭다.
사람들에게도 그렇지만 자신들에게는 더 그렇다.
먹이도 제때 받아먹을 수 있고, 똥도 사람들이 깨끗하게 치워준다.
최소한 겉보기에는 그렇다는 얘기다.

자유가 주어진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손쉽게 ‘자유’라는 말을 내 뱉지만
사실 늘 자유롭지 못한 나 자신을 발견한다.
누구도 나를 잡아 매 놓지는 않은 것 같은데
무언가에 묶여서 그 언저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나.

자유...
소리와 토리에게 자유시간을 좀 더 주어야겠다.

*소리-풍산개♀, 토리-삽살개♂

2005. 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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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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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계속 온다.
어제 밤부터 쉬지 않고...
어제까지만 해도 비가 와주기를 바랬다.
메마른 대지를 위해서도 그렇고,
실은 좀 방에 쳐 박혀 있고 싶은 소망에서도 그랬다.
대부분의 농부들은 비가 오더라도 쉬는 날은 아니다.
논 물고도 봐야 하고, 뒷집 형처럼 비를 맞으면서도 제초작업은 한다.
그러나 나 같이 농사 흉내만 내고 있는 사람은 별 일이 없다.
단, 아침부터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고추가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비를 맞으면서까지 나가서 줄을 매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비가 그치지 않고 계속 오고, 날도 어두워져 가니 좀 걱정이 된다.
고추가 기절하다 못해 죽어버리기라도 하면 어쩔까 해서.

때로 학수고대하여 그 일이 실현이 되면
막상 그 현실이 지루해질 때가 있다.
변덕스런 이놈의 인생에게 인지상정이겠지만.
지금이 그렇다.
비가 그만 왔으면 좋겠다.
닭장에도 비가 그만 뿌리쳤으면 좋겠고,
소리와 토리에게도 비 걱정 않고 풀어놓아 자유 시간을 주고 싶다.
그리고 고추나 허브도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되면 좋겠다.
(장마는 어찌 날지...)

비오는 날,
난 집안에 틀어박혀서 대나무로 이것저것을 뚝딱뚝딱 만들었다.

2005. 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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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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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가다2

깨어살리/돌소리 2006. 10. 16. 19:28
오늘도 속리산을 넘어 괴산에 가서 노가다를 했다.
구조물을 철거한 옥상에 방수를 하고,
대문 옆에 흐르는 수로를 콘크리트로 덮는 작업을 했다.
지난번에는 혼자서 작업을 하는 것이라 내 페이스를 따라서 할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집 주인 아저씨와 목수 한 분이 함께 하셔서 그 분들 따라가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중에는 마치 천 미터 달리기를 하고 들어왔을 때의 그런 상태까지 가게 되어
쪼그리고 앉아서 50대 아저씨들이 일하는 모습을 뻔히 보고 있을 때도 있었다.
내가 이렇게 허약한가 하면서도
그냥 서 있어도 힘든 땡볕아래서 장시간 긴 붓으로 방수액을 바르고,
이런 저런 것들을 들어 나르는 일은 힘이 안 들면 이상한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소위 말해 노가다로 잔뼈가 굵은 분들은 힘 조절을 하면서 넉넉하게 일을 해 가는 것 같다.
나 같은 초보 노가다 꾼은 어디에 어떻게 힘을 줘야하는지 방향을 잡지 못하고 헤맬 수밖에 없었다.

강단에서 설교하면서 땀에 대해서나, 일에 대해서 너무 쉽게 말했던 것 같다.
어쩌면 ‘잘 모르니’ 함부로 말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주인아저씨는
‘이런 일도 해 봐야 돼, 그래야 두려움이 없어지거든!’ 하셨다.
맞다.
어떤 일이든 한 번 몸으로 해보면 다음에 해야 할 때 작업에 대한 그림을 쉽게 그릴 수 있다.
하지만 그 말씀을 들을 때 내 귀에는 잘 들어오지 않았다.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아서였을까?

이런 분들과 함께 어울려 일하는데 장애가 많다.
이제껏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아 왔기 때문일 거다.
교회에서 말하는 실천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다른 이들에게 일방적으로 전하는 것이 실천인가?
실천은 바로 이들의 말을 듣는 것,
그래서 그들의 언어를 배우는 것이 아닐지.
전혀 다는 세계에 살면서 잠시 한 발짝 들여 놓았다가 서둘러 빼버리는 것이 실천은 아닐 것 같다.
교회 밖에 관심을 가져야하는데 교회 안으로도 충분히 정신이 없다.

오늘 함께 일했던 목수 아저씨는 장로님이라고 했다.
난 그 분에게 내가 전도사라고 말씀드리지 못했다.

2005.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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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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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들은 더 이상 홀로 살 수 없게 된 것 같다.
그것들을 돌봐주는 누군가, 바로 사람이 필요하다.
물론 자유롭게 떠돌아다니는 것들도 있지만,
그것들의 몰골은 개의 그것이 아니다(사람의 입장에서 그렇겠지만).

아무튼 개만큼 사람에게 가까운 짐승은 없다.
사람에게 개가 있다는 것은 행운이나 다름없다.
여러 측면에서 인생에 참 좋은 동반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개뿐만 아니라 닭이나 오리, 소 같은 것들도 서로에게 의존하여 생활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이들과 사람들은 오랜 시간 공생하며 서로에게 필요한 것들을 주고받았다.

반면에 참 아름답게 보이지만 재앙이 되어 버리는 관계가 있으니
다름 아니라 개미와 진디물의 공생이다.
개미는 진디물을 마치 가축과도 같이 사육을 한다.
적당한 곳에 옮겨 주고 그것들의 분비물을 받아 간다.
여기까지는 아주 신기하기도 하고 관찰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하지만 이 개미가 진디물을 고추 잎이나 오이 잎에 옮겨 놓았을 때,
마냥 들여다보고만 있다가는 참담한 현실과 마주해야 한다.
작물이 더 이상 자라지 않고 비실비실 죽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농약(흙살림에서 나온 친환경 농약)을 물에 타야한다.
그리고 열심히 진디물이 있는 곳, 있을 만한 곳, 번질 가능성이 있는 곳에 구석구석 뿌려준다.

더불어 살아가는 것은
사람과 개, 개미와 진디물이 같지만
한 쪽은 긍정이지만 한 쪽은 부정이다.

이미 생태계 순환의 고리를 끊고 절대자가 되어버린 사람에게
다른 어떤 존재와의 진정한 공생은 가능한 것인가?

2005. 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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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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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금요일에 황간 장에서 병아리 일곱 마리와 오리 두 마리를 구입했다.
일단은 컨테이너로 덮어 놓고 물과 모이를 넣어주었다.

닭을 키우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고,
닭장도 지어야겠다는 생각도 있었는데
병아리들이 삐약삐약 소리를 내고 있으니 당장 급한 일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서둘러 꼬박 이틀을 닭장 짓는데 투자하게 되었다.

오자마자 오리 한 마리가 죽고,
닭도 한 마리가 비틀비틀하더니 이틀만에 죽고 말았다.
그래서 모두 합해 여덟마리가 남았다.

사실은 어미 닭이 품어서 알을 깨고 나온 병아리를 기르고 싶었다.
부화기에서 깬 병아리는 후에 알을 낳아도 품지 않는다고 한다.
알을 먹거나, 닭을 잡아서 고기를 먹는 것은 동일하지만,
이 병아리들로는 다음 세대를 바랄 수는 없는 것이다.
어쩌면 생명은 있는 것이지만 생명이 없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닌지.

인간들이 인간들만을 위해서 손을 대면 그 안에 생명이 소멸되어 간다.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다른 점이 없지만
그것들은 한 번으로 끝나버린다.

짐승뿐만 아니다.
우리가 먹는 곡식, 채소 들 역시 채종(seed gathering)은 거의 되지 않는다.
해마다 종자를 구입해서 심어야 한다.

인간의 눈에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게 자란 작물은 다음 세대로 자신의 생명을 전하지 못하는 운명이다.

우리가 먹는 것들이 거의 이런 상황이다.
생명력이 활발한 것을 먹어도 부족한 현대인들이
마치 자신들과 같이 생명력 없이 겉만 번드르르한 먹거리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작고 볼품 없더라도, 혹 맛이 좀 덜하더라도 생명력을 가진 것을 귀하게 여길 수 있었으면...

2005. 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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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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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크리트로 포장된 길을 자전거를 타고 지날 때 생각한다.
길을 벗어나서 개천이나 논에 빠졌을 때의 상황을...

그런데 오늘 그 일이 현실이 됐다.
향유네와 저녁을 먹으려고 7시 경 향유네 포도밭으로 가려고 집을 나섰다.
자전거를 타고 출발을 했는데 앞에 달린 바구니가 좀 돌아가 있어서 바로 잡았다.
그런데 그 순간 자전거의 방향이 한쪽으로 쏠리더니
그만 바로 옆 논으로 ‘어! 어! 어!’ 소리와 함께 떨어지고 만 것이다.

그 논은 길에서 한참 아래에 있는 논이다.
지난주에 모네기를 해서 모가 자그마하게 심겨져 있고,
물이 차 있으니 바닥은 늪과 같은 상태였다.

정신없이 몸을 일으켜서 자전거를 당겨서 끌고 반대편으로 나왔다.
다행히 주변에 사람이 없어서 창피함은 덜 했지만,
그 황당함이란 말로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서둘러 집으로 달려와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안경이 없네!’
곧바로 어머니는 논으로 달려가셔서 소리치신다.
‘민태야, 장화신고 와!’
달려가서 내가 떨어졌던 곳에 반쯤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안경을 발견하고
내가 어떻게 빠져나왔을 까 싶은 논바닥을 겨우 걸어가서 꺼내왔다.

신발도 옷도 자전거도 진흙투성이가 되었다.
그리고 내 마음도 과장을 조금하면 참담한 심정이 되었다.
별일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보면
약한 모습만 보이고 있는 것이니 말이다.

앞으로는 쓸데 없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 겠다.
괜실히 그 것이 현실이 되어버리면 크게 낭패를 보게 되니 말이다.
아무튼 오늘은 경험해보지 않아도 되는 일까지 경험해 본 날이다.

2005. 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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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가다1

깨어살리/돌소리 2006. 10. 15. 15:50
지난 주 화요일과 목요일에 소위 말하는 노가다라는 것을 했다.
귀농학교 동기 중에 괴산에 사시는 분이 집에 일거리가 있다고 하셔서 어떨 결에 가게 되었다.
일은 옥상에 설치되어 있는 비닐하우스를 뜯어내고
파이프들을 견고하게 부착시키려고 사용한 시멘트 블록을 떼어내는 작업이었다.
얼핏 보기에는 손쉽게 해치울 수 있는 일거리 같았는데
막상 일을 시작하니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이게 정말 노가다구나’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기술자들은 정해진 어떤 일을 한다.
하지만 밑에서 잡부(일본어로 시다라고 하던가?)는 기술자가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어떤 일이든 하게 된다.
바로 그것이 노가다이다.
우리는 주로 집을 짓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노동일을 한다고 하거나 노가다를 한다고 한다.
엄밀히 말하면 집을 짓는 일 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 기술자를 도와 잡일을 하는 것을 노가다라 할 수 있겠다.

아무튼 내가 한 일이 기술자를 돕는 일은 아니었지만,
비닐과 천막을 걷어내 접어놓고,
파이프를 뽑아 한 쪽에 정리해 두고,
블록 사이에 넣어둔 모래 퍼내고,
블록을 망치와 정으로 깨뜨려 자루에 담아 마당으로 내리는 일이었으니
노가다도 이런 노가다가 없는 거다.

아무튼 정의 머리를 때려야 할 망치가 왼손을 수차례 때린 후에야
겨우 옥상의 구조물이 깨끗하게 사라지게 되었다.
어깨에 멍이 들고, 팔은 저리고, 이튿날 아침에는 손도 퉁퉁 부어 잘 쥐어지지도 않았다.
그리고 급기야 토요일에는 몸살이 나서 열이 펄펄 끓는 지경까지 발생했다.
덕분에 ‘농사를 짓겠다고?’, ‘일은 무슨 일이냐?’하시는 어머니의 한숨석인 걱정도 듣게 되었다.

정말 그 노가다 때문에 몸살이 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결국 ‘정직한 땀 흘림’이라는 것은 나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내가 지금까지 가지고 왔던 의식뿐만 아니라 내 육체와의 싸움 말이다.

난 오늘도 ‘노가다’를 했다.
늘어난 견공들을 위해 개집을 대대적으로 보수 확장했다.

2005. 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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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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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쇠스랑으로 땅을 파다보면 내가 흙이 되고, 흙이 내가 된다.

‘이 흙은 언제부터 여기 있었을까’를 물어보면,
‘나는 언제부터 있었지?’라는 물음이 자연스레 이어진다.
여기 이곳에서 숫한 해를 보냈을 이 흙들이 나보다는 훨씬, 아주 많이 선배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선배님들을 선배대접하지는 못할망정
풀이 많네, 돌이 많네 하며 투덜거리기만 했으니.
나는 그러고 보면 참 버릇없는 후배다.

어쩌면 난 이 흙들보다도 더 거친 흙일지도 모르는데...
하나님께서 이 거친 흙을 갈면서 얼마나 손목이 아프실까?
아니 어쩌면 돌들이 섞여 있고, 풀들이 빽빽이 자라도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시며,
내가 스스로 갈아엎어 가기를 기다리고 계실지도 모른다.
앞집 할머니 같으면 제초제 뿌려서 씨를 말려 버리셨겠지만,
우리 하나님은 생태주의자시니 그런 모진 짓은 못하시고,
답답하지만 참아 기다리실 거다.

흙은 참 마음이 넓다.
나도 받아 주었으니...
아니다.
나도 흙이다.
너무 늦게 돌아온 것일 뿐.

내가 흙이고, 흙이 나다.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창3:23

2005. 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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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을 하면서 하고 싶었던 것들이 몇 가지 있었다.
물론 농사를 지으며 땀을 흘리겠다는 것이 가장 우선이다.
그리고 생태적 삶을 위해 하고 싶은 일들을 들라면
구들방에 불을 떼며 사는 것,
똥오줌 분리형 화장실을 만드는 것,
음식물 퇴비장을 잘 만들어 보는 것 등이었다.

그 중에 오늘 음식물 찌꺼기 퇴비장을 거의 완성했다.
안산주말농장에서 본 것처럼 널판을 사방으로 붙여 뚜껑을 덮는 구조로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그런 나무가 없을까를 찾아보았지만 집주변에서는 구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나무를 사서 만든다는 것도 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이 되었다.
그래서 퇴비장 만드는 일이 차일피일 미루어졌고, 대문 앞에 임시로 만들어 놓은 곳은 포화상태에 이제는 악취까지 나게 되는 수준까지 이르게 됐다.
그래서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대나무로라도 만들어 보기로 했다.
하지만 그게 그리 쉬운 일인가?
대나무를 자르고 다듬고, 크기에 맞게 절단해서 세워 땅에 박은 네 기둥에 묶는 작업을 해야 했다.
생각으로야 그리 어렵지 않은 작업이지만 막상 철사로 하나하나 묶어 가는 작업은 시간도 더디고,
팬지를 쥔 손이 얼얼해서 작업 능률도 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은 그 일을 하려고 하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미완성으로 두는 것이 어쩐지 거림직하고,
뭔가 끝을 보아야겠다는 생각에 감자밭에 신문을 씌운 후 다시 시작했다.
대나무가 부족해서 숲에 들어가 더 베 오고 토막을 냈다.
철사도 없어서 어찌해야 할지 몰랐지만 녹슨 것이라도 쓰기로 하니 널린 것이 철사였다.
양 끝을 묶는 작업이니 시간은 좀 걸렸지만 쪼그리고 앉아 작업하는 내 어깨를 넘어 갈 때는 보람도 더불어 올라갔다.
더구나 퍼낼 수 있도록 한 쪽을 열어 두니 작업도 빨랐고 대나무도 적게 들어가 일석이조가 되었다.

지나가는 마을 분들의 시선이 곱지 않다.
곱지 않은 것이 아니라 신기하다는 눈빛이다.
‘뭘 지어요?’ 하는 뒷집 창식이형.
‘개집 짖나?’ 하시는 기씨 아저씨.
충분히 그 분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모습이니.
만들고 보니 길에서 너무도 잘 보이는 곳에 대나무 빛 짙은 초록색을 드러냈다.

생태적으로 살고 싶다는 소망.
그리고 그것을 실현해 가는 과정.
어쩌면 그것은 자연이 살아 숲 쉬는 이곳에서 더 생경한 풍경이다.
음식물 찌꺼기를 따로 모아 거름을 만들겠다고 조그만 퇴비장을 만들고 있는 모습이 얼마나 우습게 보일까?

보너스로 굵은 대나무를 가져다가 드릴로 구멍을 뚫고 얇은 가지를 비스듬히 다섯 개 정도 박아 넣어 옷걸이를 만들었다.
작업복을 걸기 위한 것으로 문 밖에 두는 것이다.
아무래도 작업하던 먼지 붙은 옷을 집 안에 쌓아두는 것이 꺼림직 했다.
아무튼 아이디어는 좋았는데 완성도는 좀 떨어지는 것 같다.

애물단지 같은 대나무를 이렇게 저렇게 활용할 수 있어 좋다.

2005. 4.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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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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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가 저렸다.
그러니까 짧게 끝내야 하는 것을...

이제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는 시간을 줄여야 한다.
그렇지 않았다가는 주저앉아 버리는 사고가 발생하고 말 것이다.

서울에 있을 때 마음에 걸리는 것 중 하나가 바로 화장실 문제였다.
나 하나 존재 비용이 너무나 크다는 것을 실감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한 덩어리, 혹은 한 그릇정도의 양을 내어놓고, 몇 바가지의 물을 섞어 흘려보내야 하다니.
그것도 아무런 책임감이나 가책도 없이.
어떻게든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싶었다.
그렇다고 무슨 환경운동가로서 변신을 꾀할 수 있는 주변머리가 있지도 못하고.
대안이라면 떠나는 수밖에.
똥의 순환이 있는 곳으로.

비록 다리가 저려 일어나는데 어려움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행복하다.
나에게서 배설된 이 똥이 그냥 버려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양 그대로 밭으로, 누군가의 밑거름이 되고, 또다시 풍성한 양식이 되어 나에게 돌아온다.

더 이상 내가 나 하나로만 동떨어져 존재하지 않음에 기쁨의 이유가 있다.
나는 이제 이 대자연의 한 일원으로서 역할을 하게 되었다.
내가 다리 저려하며 있을 때 그것은 바로 그 대순환의 한 점에 서 있는 것이니.

2005. 4.8. 일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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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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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에 와서 어르신들에게 자주 듣는 얘기들이 몇가지 있다.
그 중에서도 농사와 관련된 것으로
제초제와 농약의 사용에 관한 것이다.

농사에 있어 제초제를 사용해야 하는 단계,
농약을 사용해야 하는 단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 때 반드시 사용하지 않으면 그 것은 농사가 안되는 것으로 여기신다.
심지어는 당신들이 살고 계신 집 주변에 자라는 풀들도 그냥 보지 못하시고
제초제를 뿌려서 다 고사를 시켜야 직성이 풀리신다.

그런 모습을 비판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젊은 시절 농사를 지으며 그것들이 고된 일손에 얼마나 도움이 주었을까?
그래서 이제는 농사에 있어 제초제, 농약 그러면 상식이 되어 있는 것이리라.

아니 어쩌면 믿음의 대상이 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웃도, 때로 자신도 믿지 못하지만 제초제와 농약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신이 되어버린 ...

2005. 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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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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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대부분의 판단의 근거는 외부에 있다.
생각도 그렇고, 말도 글도 역시 그렇다.
그래서 제3자가 중요하고, 그로부터 해법을 찾는 훈련을 받는다.
그런 것을 잘 하면 칭찬을 듣고
다른 사람보다 앞서게 되고, 보다 위에 자리하게 된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들은 자신 안에 있는 것이 아닐지.
심지어 우리가 그토록 비판하는 모순들도 역시 자신 안에 있는 것이 아닌지.
그러나 ‘제도권’의 그 무엇도 자신을 돌아보라고 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럴만한 조금의 여유도 허락하지 않는다.

관건은 얼마나 빨리, 그리고 깊이 자신의 속을 들여다보고 찾을 수 있느냐이다.
거기에 사랑도, 행복도, 외로움도, 모순도, 정의도, 불의도 모두 있다.
그것을 찾아내서 확인하고, 그것으로부터 한 발 물러서서 볼 수 있어야 한다.
누구도 대신 해 주는 사람은 없다.

사랑의 감정이 나를 넘어 서려 할 때,
불행함이 나를 무너뜨릴 때,
외로움에 젖어 울고 싶을 때,
화가 치밀어 폭발 직전일 때,
무력감에 주저앉고 싶을 때
가만가만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다면
목숨처럼 움켜쥐고 있는 것들이 별 것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

특별히 자유란 것은 더더욱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바로 마른 대지를 뚫고 나오는 새싹처럼 나 자신의 내부로부터 움터오는 것이다.

2005. 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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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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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11. 4(목) 장신대 게시판에 쓴 글

추수감사절 예배를 드리고, 떡과 사과도 받고, 밥도 그냥 먹었습니다.
정말 감사한 날입니다. 가뜩이나 용돈이 궁한 형편에 민생고가 해결되고 간식까지 얻었으니까요.
하지만 예배를 드리면서 너무나 당혹스러움을 겪고 나니 이 모든 것이 솔직히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먼 길 오셔서 후배들에게 귀한 말씀 전해 주신 목사님께는 감정은 없지만, 그 상황에 그 자리에 함께 있으며 별 문제의식을 갖지 못하는 제가 속한 공동체가 너무도 저를 답답하게 했습니다.
목사님의 입지전적 전기를 들으면 정말 감사가 있는 분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고, 추수감사예배에 적절한 분을 강사로 잘 모셨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른의 말꼬리를 잡아서 죄송하지만, 지금 예수님을 믿어서 이룬 오늘 목사님의 모습과 그렇지 않았을 때 지게나 지고, 리어카나 끌고, 잘 하면 타이탄에 야채 실어서 광장동에 와서 팔러 다니는 농부가 되었을 것이라는 말씀에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예배당 단상 앞에 풍성하게 갖은 과일과 곡식, 채소들을 진열해 놓고 드리는 예배에서 그것을 만들기 위해(물론 하나님께서 물과 양분과 햇빛을 주셨지만) 씨 뿌리고 돌보고 추수한 농부를 웃음거리로 만들 수 있는 것인지. 물론 목사님께서 이것을 목적하셨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이나 그 자리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입으로 들어가는 그 무엇 하나 생산할 수 있는 사람들인지. 농부들처럼 하늘을 바라보며 정직한 땀방울을 흘리는 사람들인지.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추수감사예배를 드린 날 최소한 농부를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우리의 먹거리를 생산하는 이들. 하나님께 허울 좋게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고 끝내지 말고, 정말 농부에게도 감사하십시오! 오늘만이라도.

사족을 달자면, 오늘 본문 말씀인 고전15:9-10에서 바울이 어떤 상황에서 그런 감사의 글을 남겼는지를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예수님 만나서 망한 사람이 바울 아닙니까? 성경의 대다수의 인물들이 예수님 혹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아서 망한 사람들 아닙니까? 그러나 그들이 왜 감사를 할까요? 하나님이 있어서, 다른 모든 조건이 최악이지만 하나님이 계셔서 감사한 거 아닌가요?

우리나라는 농부가 망하는 나라입니다. 농부 하면 망해서 사람 취급받기도 힘들죠. 그래도 그 분들은 돈을 위해서가 아니라 땅을 놀리면 벌받는다고 아픈 허리 꾸부정하게, 관절염으로 고생하는 손목으로 호미 잡고 밭으로 가시는 분들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오늘만이라도 농부들에게 감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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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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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5. 6.

'복음 안에서 동서 화해를'(땅에쓰신 글씨)에 실린 글

아영으로 가는 마지막 차량에 승차했다. 1시간 30분 가량 어르신 모시기 작전의 마지막 차량이 백전에서 출발한 것이다.
백전초등학교 앞에서 쩔쩔매며 어르신들을 대형버스에 모셔야 했다. "어르신, 시원한 차 안에서 기다리세요."라는 단순한 말 만으로…. 순순히 차량에 탑승하시는 분도 계셨지만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면 가지 않겠다고 서둘러 자리를 뜨시는 분도 계셨다. 그러나 대부분의 어르신들은 예정대로 차량에 탑승하시고 출발할 수 있었다.
사역을 오면서 내내 고민이 있었다. 선발대로 와서 작업을 할 때나 잠을 청할 때,"내일 과연 어떤 말씀을 드려야 어르신들께서 아영으로 순순히 가실까?" 하는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목사님께서 어떤 말을 우리들의 입에 넣어 주실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 목사님의 제안은 "납치"였다. 그냥 모시자는 것이었다. 구구절절이 설명하지 말고, 차에 모시고 달려 버리자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니 정말 좋은 생각인 것 같았다. 어르신들을 만나 뵙고 말씀드리는 데에 부담이 없어졌다.
정말 어르신들을 만나 "내일 저희가 모실게요. 백전초등학교 아시죠? 거기서…."이렇게 끝을 흐리기만 하면 어르신들이 자유롭게 상상하시면서 오마고 허락하셨다. 생각보다 쉽구나.
그러나 쉬운 것이 아니었다. 백전초등학교를 그냥 지나갈 때 승합차 안에 타고 계신 어르신들의 어리둥절하신 모습, 왜 초등학교로 안 들어가고 대형버스에 승차하라고 하는지 의아해하시는 어르신들, 개중에는 이미 알고 계시는 분들도 있었지만 마냥 좋아하시고, 고마워하시니 정말 몸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이렇게 승합차 아홉여 대가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경계를 넘었고, 대형버스도 두 번 넘었고, 마지막 승합차가 가고 있는 것이다. 양천.음천 마을에서 나온 차였다. 도시에서는 불가능한 일인 정원외 승차를 하고서, 어르신들 사이사이와, 문에 붙어 앉은 채로 차는 출발했다.
어디로 가는 차일까? 그 안에 앉아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백전초등학교를 그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차는 직진을 해야 한다. 그래야 백전초등학교로 간다. 그러나 차는 좌회전을 했다. 영호남을 가로지르는 88고속도로와 나란히 나 있는, 전라북도 남원시 아영면으로 난 국도로 들어선 것이다. 사역자들의 긴장과 영문을 몰라 하시는 어르신들.
"와 이리 가노?", "어데 가는데?, "백전초등학교 가는 거 아이가?" 차 안은 술렁거렸다.
차량 배차를 맡았던 나로서는 마지막 차라는 안도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일시에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몇 안 되는 사역자들은 어르신들의 눈치를 보며, 그 분들을 안심시켜야 했다.
"저희가 좋은 데로 모실게요."라는 말과 웃음 공세, 그리고 주무르기로….
한 어르신이 불안해하시며 어쩔 줄을 몰라하셨다. 그 때 옆자리에 계신 어르신이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좋은 구경 다 시키네, 고마와라. 우리 이 차 타고 서울까지 가버리자!" 하시며 옆에 긴장한 어르신의 옆구리를 찌르셨다. "와 불안한 게비지?""별 소리를 다 한다. 불안하기는…."
위기가 넘어갔다. 금세 길 옆으로 누렇게 얼굴을 드러낸 벼알들에 대한 이야기로 이야기의 초점이 자연스럽게 옮겨졌다. 함양의 그것보다 더 빠르다고….
이렇게 여기를 지났을 십여 대의 차들이 이런 긴장감을 경험했을까? 주여, 감사합니다.
차는 무사히 아영중학교에 도착했고, 아무 갈등도 반목도 없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베풀어진 잔치 마당에 함께 어우러질 수 있었다.
이렇게 사역은 문이 열렸다. 영.호남을 넘나들며 벌어진 경로잔치와 마을잔치, 함께 모여 예배드리고 찬양과 율동으로 한 팀이 되었던 노천성경학교, 그리고 청소년들의 만남이 있었다. 그 사이사이를 녹아드는 사랑의 몸짓이 되고자 했던 부족한 내가 그 곳에 있었다는 것이 또 다시 은혜로 되새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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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깨어살리/돌소리 2006. 10. 12. 09:53
오늘도 누군가 물었다.
'농촌에서 사니까 행복하세요?'

농촌에서 산다고 해서 행복해 질 수 있을까?
물론 나 자신이 그리던 삶의 환경이 펼쳐져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과 행복이라는 것과는 별개의 것이 아닐지.

도시에서 살던, 농촌에서 살던
행복은 마음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리라.
사물을 받아들이는 방법에 변화가 있지 않는 한 행복은 올 수 없다.

환경은 환경일 뿐이고,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다.
나로부터 시작되는 행복.
가만히 있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부단히 노력할 때 누릴 수 있으리라.

2005.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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